제Ⅰ부. 6.25 한국전쟁.


제1장. 한국전쟁의 진실.


 1. 한국전쟁 개요.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종식되어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 날을 ‘광복절’이라 정하였다.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은 약속 받았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미소 양국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소련의 공산진영과 미국의 민주주의 진영으로 국토가 분단의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 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다. 공산화 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 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가 반영구적인 분단으로, 비운이 현제까지 이어져 가고 있다.


2. 북한의 기습남침.


 한국전쟁은 한국군 수뇌부가 휴가나 휴일을 틈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자행했다. 러시아제 탱크[T34] 242 대를 앞세우고 북한은 선전포고도 없이 남침을 자행 하였다. 무방비 상태인 한국은 1대의 탱크도 없었으며 소총과 수류탄밖에 없었고 대전차포가 한대도 없는 상태였다.


북한군은 남침 공격개시 암호인 폭풍‘이 떨어졌다. 한반도 허리가 부러지는 요란한 폭음과 전방의 전 전선의 새벽을 뒤흔들어놓았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군은 공격준비 사격에 이어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워 서부전선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의 주문진에 이르기까지 38도선 전역에 걸쳐 일거에 쳐내려왔다.


북한의 해군과 공군도 남침에 가세했다. 특히 북한 해군은 지상군의 남침에 앞서 6월 25일 새벽3시 30분경 강릉 남방 옥계면 일대에 특수 유격부대를 침투시켰다. 또한 북한공군은 남침 당일 서울시내에 기총소사를 가했고, 여의도와 김포비행장에도 공습을 실시했다. 38도선을 돌파하고 임진강을 건넌 북한군의 제1차 목표는 서울이었다.


불시에 기습공격을 받은 한국군은 전방 병력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는 동안 후방에서는 가두방송을 통해 휴가와 외박 나왔던 장병들에게 원대복귀를 종용하는 한편 후방부대들을 긴급히 전방으로 투입시켰다. 그러나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북한의 남침사실은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전파됐고 외국의 언론들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장면 주미대사는 한국정부를 대표해서 미국에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한국시각으로 6월26일 새벽4시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긴급회합을 갖고 북한에 대해 남침을 중지하고 그들의 군대를 38도선 이북으로 즉각 철수 시킬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의정부 방어선을 돌파하고 6월27일 오후부터는 서울로 집중 공격해왔고 한국군은 미아리일대에서 북한군의 서울진입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개전 3일 만인 6월28일 오전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당시 서울 한강상의 유일한 다리었던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조기에 폭파됐다. 이로 인해 서울을 방어하던 한국군은 한강을 보호하기 위해 분산됨으로써 한국군의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한강이남 진출을 지연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원으로 철수한 육군본부는 전투 사령부를 설치하고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시각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제2차 회합을 갖고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안‘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미국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6월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미군의 참전에 따른 작전을 구상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한강단선철교를 수리한 다음 7월3일 탱크를 앞세우고 한강도하에 성공함으로서 한강방어선은 붕괴됐고 한국군은 후퇴 길에 올라야만했다. 그리고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피난민들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남으로 무거운 발길을 재촉해야만했다.  

      

 

↑[6월 25일 새벽 4시 정각, 10개 사단 병력 북한군에게 공격개시를 뜻하는 암호 명령

<폭풍>이 떨어졌다. 전쟁의 포성은 38선이 지나는 황해도 옹진반도를 비롯해 개성과

춘천, 그리고 동해안 지역에 일제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완전한 기습이었다.

사진은 공격중인 인민군의 소련제 T-34 탱크의 모습이다.]

 


 서울 시내로 들어온 인민군대의 소련제 T-34탱크. 이것은 소련군이 2차 세계 대전 때

대독전선에서 전과를 올린 것과 같이 6.25때 북한군의 선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등포와 서울 시가를 잇는 폭파된 한강철교. 미 제1해병사단의 한 병사가 한강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1950.9.23)]


3. 유엔군 과 아군의 전황.


1]. 낙동강 최후저지 작전.


미 제 24사단소속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공수된 후 곧 전선으로 출동했다. 오산 북방 죽미령 일대에서 방어 진지를 구축한 스미스 대대는 1950년 7월 5일 북한군과 처음으로 맞붙어 싸웠다. 그러나 열세한 병력과 빈약한 무기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북한군의 전투 대한 정보가 너무나 어두웠던 결과였다.

전선은 다시 남으로 밀렸고 아군은 금강과 소백산맥 일대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금강 방어선을 뚫고 대전을 포위 공격해왔다. 딘 소장이 이끄는 미 제 24보병사단은 대전을 사수하기 위해 시가전까지 벌였지만 결국 30%의 병력손실을 잃은 체 물러났고 딘 소장은 적진에 낙오돼 포로가 됐다.


한편 한국군은 진천, 단양, 화령장 등 중동부 전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지연전을 전개했다.

특히 한국군 제 17연대는 화령장[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에서 북한군 제 15사단을 기습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후퇴만 거듭하던 당시 상황으로서는 큰 전과가 아닐 수 없었다. 7월말이 되자 북한군은 한반도의 95%를 점령했고, 아군은 8월 초순경 총연장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무렵 항도 부산에는 연일 UN군의 병력과 군수물자들이 들어왔고 한국군에게도 대포가 지급되는 등 전투력이 크게 보강돼갔다. 한편 전위를 가다듬은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전 전선에 걸쳐 활기 공세를 취해왔다. 특히 북한군 주력 부대는 대구 점령을 목표로 낙동강을 건너 다부동 일대로 쳐들어왔다 이에 맞선 아군은 외관 서북방의 집결중인 북한군을 섬멸하기 위해 융단폭격을 실시하는 등 필사적인 방어전 끝에 큰 참패를 안겨주었다.


8월과 9월에 걸쳐 계속되던 다부동 지구 전투는 한때 북한군이 대구 북방 팔공산까지 침투해왔지만 아군은 이들을 완전 섬멸, 전세를 역전하는데 성공했다. 동부전선에 안강 지역과 포항지역에서도 북한군의 활기찬 공세가 실시됐다. 한 달이 넘도록 대접전이 벌어졌던 포항지구 전투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이 학도의용군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조국을 위해 못다 핀 꽃송이처럼 숨져간 수많은 학생들! 군번도 계급도 없이 책되신 총을 들고 싸우다 숨져간 학생들의 거룩한 희생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실패한 북한군은 다시 영천방면으로 총공세를 취해왔다. 9월2일부터 시작된 영천지구 전투는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한때 영천을 빼앗김으로서 낙동강 방어선은 붕괴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군은 영천을 탈환하기 위해 공중폭격으로부터 공격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것이 낙동강 방어 전투에서 영천 대전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9월10일 한국군 제 2군단은 마침내 영천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피아간에 엄청난 희생자를 낸 영천 섬멸전에서 북한군은 완전 재기불능상태로 퇴멸[退滅] 된 채 북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북한군 포로들 중에는 초등학생 같은 나이 어린 포로들도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남한에서 인민의용군이라는 미명하에 북한군에게 강제로 동원됐던 학생들이었다.

 

 

 

이 무렵, 유엔 참전국으로 한국에 파견된 여러 나라 군대들이 본격적으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영국군은 미국의 절대적인 우방으로 일찍부터 참전했고, 1951년 여름부터는 영 연방 국가들이 참전하였다. 참전 국가는 모두 16개 나라이며 북미,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세계 각처에서 왔다. 유엔참전국 국기를 든 각국의 군인들. 왼쪽부터 호주, 미국, UN, 한국, 영국, 필리핀 국기(1950.9.28, 부산)


2]. 인천 상륙작전.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미10군단을 창설하여 7만5천명의 육군과 261척의 군함을 동원했다, 일본에서 승선 부산을 거쳐 인천항으로 진격했다. 첫 공격목표는 월미도였다.


- 전투시기 : 1950.9.15

- 전투지역 : 인천

- 주요지휘관: 스트러블 해군중장(ArthurD.Struble),                 

             도일해군소장    (James H. Doyle)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 사업회) 

 

 인천상륙작전 개요.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장군의 지휘아래 국제연합군(UN)과 국군이 합동으로 1950년 9월 15일 새벽에 전격적으로 실시한 합동 군사작전을 말한다. 이 작전은 인천과 수원일대를 연합군이 장악함으로써 서울 수복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인민군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함은 물론 적의 군 지휘 및 통신체제를 파괴함으로서 인천과 낙동강 전선 사이에 배치된 인민군의 고립 섬멸을 목적으로 했다.


조선인민군은 1950년 6.25전쟁 시작과 함께 남진을 계속하다 국제연합군과 한국군의 필사적인 방어 노력으로 인해 낙동강 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맥아더를 중심으로 한 국제연합군(UN)과 국군은 수세에 몰려있던 낙동강 전선을 공세로 전환하기 위해 1950년 9월 15일 7만 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함정을 동원하여 전격적인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국제연합군과 국군은 9월 15일 한, 미 해병대의 월미도 상륙으로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공세로 일시에 역전시켰으며, 그 여세를 몰아 작전 개시 열 하루만인 9월 26일에는 서울을 다시 되찾는데 성공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주요 지휘관


제 7합동기동함대 사령관 해군중장 아더스트러블(Arthur D. Struble)

제 10군단장 육군소장 에드워드 아몬드(Edward M. Almond)

제 1해병사단장 해병소장 올리버 스미스(Oliver P. Smith)

제 1해병비행단장 해병소장 필드 해리스 (Field Harris)

제 7보병사단장 육군소장 데이비드 바아(David G. Barr)

한국함대 총참모장 해군소장 손원일.

한국해병대 사령관 해군대령 신현준.

한국육군 제 17연대장 대령 백인엽.


지상군 총 병력 약 : 75,000명

함정 : 미국-226척, 한국-15척, 영국 - 12척, 캐나다 - 3척, 호주 - 2 척, 뉴질랜드 - 2척, 프랑스 - 1척 총 261척


<적군>

서울위술 제 18사단장 김훈

인천경비여단장 박훈일

총 병력 : 약 20,000명


3]. 인천상륙작전의 진행 과정.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장군이 한강전선을 시찰할 때 이미 계획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한강전선을 직접 돌아보면서 자신의 참모장인 알몬드 장군에게 상륙작전 계획 수립을 지시했고, 그 결과 합동전략기획단(JSPOG : Joint Strategic Plans and Operations Group)이 설치되었다. 합동전략기획단은 1950년 7월 22일 일본주둔 미군 제1기병사단의 인천 상륙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Blue Heart” 작전을 수립하였으나, 1950년 8월 12일 맥아더장군은 인천을 상륙작전 지점으로 결정하고, 인천상륙작전 실행을 위한 주력 부대로 미군 제 10군단을 일본에서 창설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과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공세를 펼치게 될 이 작전의 이름을 크로마이트(Chromite)라 명명했다.

  

맥아더가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최종 낙점한데는 낙동강 전선에 집중된 인민군의 전력 분산효과, 병참선 차단 및 군 지휘체계와 통신체제 파괴를 통한 인민군의 전력 약화 추구, 수도 서울 수복 시 적에게 가할 심리적 타격 등을 고려한데 따른 것이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긴급회의 석상에서도 계속해서 맥아더의 인천상륙 계획에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출했다. 특히 미 해군참모총장 셔만 제독은 “인천은 평균 간만의 차이가 20.7피트로 세계에서 가장 심한 곳 중의 하나다.


따라서 만조 시간으로부터 2시간 후에는 상륙정들이 모조리 인천항의 진흙 속에 빠져 해안에 배치된 인민군의 각종 포화에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상륙해안의 접근수로를 감시, 제어하는 월미도를 사전에 제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전 늦게 월미도의 저항을 무력화시킨다 해도 오후의 만조시간을 고려한다면 교두보를 확보한 다음 야습에 대비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부대에 충분한 보급을 추진하기 위한 가용시간은 2시간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상륙작전 지점으로 인천의 부적절함을 역설했다.


이와 더불어 미 육군참모총장인 콜린스 장군도 또한 “인천이 작전선 후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서울을 탈환한다 해도 낙동강 방어선 안에 있는 워커장군의 지상군부대와의 연결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런 강력한 반대 견해에도 불구하고, 45분간에 걸친 연설을 통해 이들을 설득하고 인천을 상륙작전 지점으로 최종 확정하게 된다. 맥아더는 이때 인천 상륙의 위험성을 자인하면서도 오히려 이런 위험성 때문에 방심하고 있는 적의 허를 찔러 기습 효과를 강화할 수 있고, 작전 성공가능성은 높지만 작전 효과가 적은 군산상륙보다 적의 포위섬멸을 통한 전세 역전이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인천상륙작전을 끝까지 관철시켰다.


:: 인천상륙작전의 결과.


인천상륙작전 수행을 위해 잠정 편성된 제7합동기동부대는 9월 9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수행 명령에 따라 제7함대 사령관이 9월 11일 0시를 기해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상륙 준비를 위해 편성된 병력이 9월 10일 각지에 집결되었는데, 미 해병대 제 1사단은 고베에, 미 육군 제 7사단은 요코하마에 집결하였으며, 미 제 5해병연대와 국군 제 17연대 및 국군 해병대는 부산에, 대부분의 호위선박과 함포 사격지원전대, 기함은 사세보에 집결하였다. 동원된 함정의 총 숫자 약 270척, 병력은 7만여 명에 달했다.


또한 합동기동부대가 편성되기 이전에 선발부대 작전으로서 목표지점에 대한 공중폭격 및 기만작전과 양동작전이 사전에 시행되었다. 상륙지역의 고립을 위한 공중폭격이 9월 4일부터 9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


9월 4일부터 10일까지 함재기가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반경 50km이내 지역의 교통로 차단을 위한 폭격이 실시한데 이어, 양동작전 수행을 원산에도 동일한 폭격작전을 수행했다. 해병대 항공기도 9월 10일 이후에만 65회의 인천 맹폭격을 실시하였다. 9월 12일에는 미 육군과 영국 해병대가 기만작전 및 양동작전의 목적으로 군산 상륙기습을 감행하였으며,


9월 13일에는 동해안 삼척과 서해안 진남포에 대하여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그리고 목표지점에 대한 선견부대 작전으로 9월 15일의 본 상륙에 앞서 9월 13일과 14일 양일간에 걸쳐 인천과 월미도의 사전제압을 위해 순양함 4척과 구축함 6척을 동원한 집중적인 함포사격 및 항공폭격을 가하였다.


13일 10시경에 인천항 어구에 도착한 함대는 12시 30분에 월미도를 향하여 포격을 시작했고, 인민군의 75mm포의 응사로 순양함 한 척이 심한 피해를 입었다. 13시 47분 구축함이 철수한 뒤, 13시 52분부터 순양함들이 인민군 포대 사정권 밖에서 한 시간 반 동안 포격을 계속하는 동시에 항공기로 월미도를 공격하였다.


이후 16시 10분에 다시 30분간 포격을 가한 후 함대는 수로에서 철수하였다. 익일14일엔 11시경 순양함이 포격을 시작하면서 항공기를 발진시켜 공격하였고, 13시경 구축함도 포문을 열어 포격을 가한 뒤 철수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서울 수복을 포함하면 3단계 작전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가운데 인천상륙 돌격은 2단계로 시행되었다. 지상군 상륙작전의 세부 계획에 따르면, 미 제 5해병연대 3대대(한국군 해병대 1개 중대 포함)가 9월 15일 오전 6시 30분 월미도 ’Green Beach' 지점, 미 제 5해병연대 주력부대(한국군 해병대 제 3대대 포함)와 미 제 1해병연대는 오후 5시 30분 각각 인천북방 ‘Red Beach'지점과 인천 남방 ’Blue Beach' 지점에 상륙하게 되어 있었다.


이와 더불어 ‘Red Beach'로 들어간 한국군 해병대는 인천 시내에서 인민군 시가 소탕전을 담당하며, 미 제 1해병사단은 교두보 확보 후 김포에서 서울로 진격하고, 후속 상륙한 한국군 제 17연대와 미 제 7사단 주력 부대는 서울 남쪽 방면을 공격함과 동시에 일부 전력은 수원으로 남진하여 서울 이남에 위치한 적의 퇴로 차단임무를 부여 받았다.


지상군의 인천상륙작전의 1단계는 월미도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9월 15일 5시를 기하여 공격준비사격이 실시되고, 만조시간인 6시 30분경 함포사격 및 항공폭격의 엄호를 받으며 한국군 해병대 1개 중대를 포함한 미 제 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량과 함께 ‘Green Beach’에 상륙, 07시 50분에 소월미도를 포함한 도서일대를 완전 장악하고 소탕전을 실시하였다.


지상군의 2단계 작전은 인천반도를 확보하기 위한 본격적인 상륙이었다. 오후 만조시간인 17시 30분경 한국군 해병대 제 3대대가 포함된 미 제 5해병연대가 ‘Red Beach’로 상륙하여 22분 만에 묘지고지를 점령한데 이어 20시에 관측고지를 접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미 제 1해병연대는 ‘Blue Beach’에 상륙하였고, 20시경 2개 대대로 이루어진 한국군 해병연대가 ‘Red Beach’에 예비부대로 상륙하여 인천 시가에서 인민군 소탕전을 벌였다.

  

9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작전 최종 목표 지역을 모두 탈취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오전 7시 30분 해병연대가 합류하여 인천 방호 선을 강화했다. 상륙 당일 연합군과 국군은 경미한 피해 속에서 약 2천 병력의 인민군을 소탕하고, 16일 18시에 인천을 중심으로 한 48km의 해안교두보 확보에 성공했다.


17일 미 해병대 제 1사단과 한국군 해병대가 김포공항 및 영등포를 향하여 진격하는 동안 제 2진인 미 육군 제 7사단과 미 해병 제 7연대를 비롯한 미 제 10군단의 후속 상륙이 계속되었고, 21일 18시에 제 10군단의 전투지휘소가 해안에 설치됨으로써 제 7합동 기동부대는 상륙작전 임무를 완수하고 해체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의 마지막 3단계는 서울 수복 작전이었다. 한국군 해병대 2개 대대와 미 해병대 제 1사단은 9월 19일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공격을 개시하였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26일 정오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로써 서울 수복과 더불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 시 현황 지도.


 

인천상륙작전을 직접 지휘한 맥아더장군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과 화력지원함대 등은 고베, 요코하마, 사세보 등에서 출항하고 국군

해병대와 제17연대 그리고 미 제5해병대 등은 부산에서 승선하였다. 기함인 마운트 맥킨리

함에는 맥아더와 그의 참모진이 동승하였다. 지상군 75,000명, 함선 251척의 대구모 부대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사진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될 부대가 부산항에 집결해 승선

하고 있다.(1950.9.12, 부산항)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과 화력지원함대

고베, 요코하마, 사세보 등에서 출항하고 국군 해병대와 제17연대 그리고 미 제5해병대 등은 부산에서 승선하였다. 지상군 75,000명, 함선 251척의 대구모 부대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사진은 이군함 전면에 40mm 대공포, 뒤쪽으로 5인치 대공포가 보인다.

 

 

[인천상륙작전의 디데이는 1950년 9월 15일이었다. 새벽 2시에 인천 앞바다에 정렬하였다.

재차 수정 보완된 인천상륙작전의 첫 번째 공격목표는 월미도였다. 방어부대의 반격은 거의 없었다. 사진은 인천상륙작전 D-데이어 항공촬영 장면이다.]

 

 


 

서울도처에서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벌어진 서울 시가전 모습이다



 

             한국군 해병대가 9월 26일 정오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1950년 9월 29일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수복기념식에서 이승만과 맥아더가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1950.9.29, 중앙청)]


 

[1950년 9월 29일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수복기념식에서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의례 순서로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서울시내 모습이다. 오른쪽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1950.10.18)]


 


10월 1일 마침내 동부전선에서 한국군이 먼저 38선을 넘었다. 이후 계속된 북진의 결과 10월 9일 수도 사단은 신고산에 도착해 북한군의 퇴로인 경원선 철도를 차단했다. 사진은 유엔군의 폭격을 맞은 원산의 모습이다. 검게 그을린 굴뚝들만 남아 있어 공장지대였음을 보여준다.(1950.11.4)


 


[환영 나온 주민들은 6.25전까지는 북한의 통치 아래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태극기를 든

주민들 가운데에는 태극기와 인민공화국 기를 구별하지 못하는 나이든 노인들도 있었다.

사진은 평양입성 환영대회(1950.10.27)]



4. 중공군 개입과 휴전협정.                       (처음으로)


1]. 중공군 개입


북한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중국에 특별사절단을 보내 지원 요청했다.

1950년10월4일 중국의 모택동은 군사위원회를 소집 한국전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중공군은 만주에서 대규모 군사 훈련중이였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19일 북한이 평양을 점령당한 후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깊숙이 중공군 30개 사단을 투입했다.


무기가 약세인 이들은 꽹과리 나팔 피리를 불면서 일시에 저돌적으로 공격했다, 이것이 이른바 인해전술 이다. UN군은 1950년 10월 29일 함경북도 장진까지 진격 한 후 중공군의 양면 작전으로 고립되어 흥남부두에서 피난민과 함께 해상으로 철수에 성공했다.  중공군이 38도선까지 밀려오자 정부는 국민들에게 피난령‘을 내렸다. 이때를 이른바 1.4후퇴라고 한다. 맥아더 장군은 만주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귀국조치하고 UN군 사령관직을 해임했다


맥아더 장군은 미 의회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살아 떠난다” 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군복을 벗었다. UN군 사령관 후임으로 리치웨이 장군이 부임했다. 아군은 37도선까지 밀렸으나 전열을 다시 정비하여 대반격을 가하였다.3월 중순에 서울을 다시 수복하고 3월 하순경에 38도선을 다시 찾았다.

 


(51.3.7, 수원). 그는 논란거리가 된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는 맥아더(1951년 3월 이후 해임의 근거가 되는 정부 비난의 문제성 발언을 거침없이 했다. 그는 ‘병력지원이 없는 한, 그리고 중국군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한 아시아에서 중국의 공격력을 저지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 국가 원수들 간의 국제적 차원에서 후속조치 결정을 촉구하였다. 결국 제한 전을 명령한 트루먼은 이러한 공개 발언을 문제 삼아 맥아더의 해임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중국군은 특유의 인해전술로 진격을 해왔다. 실전경험이 있으면서 산악지형에 익숙한

그들은 보잘 것 없는 무기로 국군과 유엔군을 궁지에 빠뜨렸다.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한 중국인민지원군은 북한에 들어서자 모두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항공 정찰로는 중국군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낮에는 산속이나 지하호 속에서 지내며 주로 야간공격을 감행했다. 사진은 진격하는 중국군의 모습.


 

↑[1950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1주년을 맞이하였다.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하였고, 맥아더가 북한에 최후통첩을 했던 이날 모택동은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격렬한 어조로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북한 부수상겸 외상인 박헌영을 통해 김일성으로부터 지원요청서를 전달받은 상태였다. 10월 4일 모택동은 비상최고군사회의를 열고 한국전 참전 결정을 내렸다. 사진은 압록강을 건너 북한에 도착한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 주민들의 환영에 환호하고 있다.

 

 

유엔군이 북에 진격한지 두 달이 안 되어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다. 사진은 폭파된 대동강의 철교를 곡예 하듯이 건너 평양을 떠나는 피난민들의 모습이다.(1950.12.4, 평양)


 

그 동안 힘을 비축해 온 중국군은 다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른바 춘계대공세였다.

공산군의 총 병력은 70개 사단, 7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사진은 동부전선에서 후퇴하는 미군들의 모습.


2]. 휴전협정 조인


6.25전쟁은 세계이목을 한반도로 집중시켰고 전쟁에 양상은 중국군의 개입으로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진영과 미국을 주축으로 한 자유진영 간에 국제전으로 변했다.


1951년 봄, 38도선 이북으로 밀려났던 공산군 측은 춘계공세를 취해왔다. 이로써 쌍방 간은 38도선 일대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게 됐다. 이 전투를 통해 쌍방은 군사적인 힘으로 상대방을 더 이상 굴복 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게 될 무렵 휴전협상의 신호가 소련으로부터 나왔다.


1951년 6월 23일 소련에 UN대표 말리크는 미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38도선을 군사경계선으로 하는 휴전을 제휴해 왔다. 휴전은 UN군 측도 바라는 바였다.


1951년 7월 10일 공산군 측 통제지역인 개성에서 첫 휴전회담이 개최됐다. UN군 측 수석대표는 미 해군 중장 조이제독 이었고 한국 측 대표는 백선엽 장군이었다. 그리고 공산군 측 수석대표는 북한에 남일 이였다. UN군 측은 일개월 정도면 휴전협정이 조인될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휴전회담은 또 다른 전쟁 이였다.


17일간에 힘겨운 협상 끝에 군사 분개선 설정과 포로에 관한 협의 등 다섯 가지의 의제를 채택하는데 겨우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군사 분개선 설정문제에 있어서 UN군 측은 쌍방 전투부대가 대치하고 있는 접촉선을 군사 분개선 으로 설정 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공산군 측은 38도선을 군사 분개선 으로 할 것을 계속 주장함으로서 휴전회담은 1개월여 만에 결렬되고 말았다. 


UN군 측은 휴전회담 재개와 휴전협정에 따른 군사 분계선을 감안하여 공격작전을 감행한 결과 전 전선을 10km이상 북으로 밀어 올렸다. 전세가 불리해진 공산군 측은 2개월 만에 휴전회담에 응해왔고 회담 장소는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겨졌다.


1951년 10월 25일부터 재개됐던 휴전회담은 두 가지에 큰 난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군사 분계선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

둘째는 포로교환 문제였다. 군사 분개선 설정문제는 휴전협정이 조인될 당시 쌍방에 군대가 접촉하고 있는 선을 군사 분개선 으로 설정 한다는데 는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포로교환 문제에있어서 쌍방의 의견은 큰 차이를 보였다. 당시 남한에는 최대 17만 명에 이르는 공산군 포로들이 거제도 등지에 수용돼있었는데 그중 7만 명이 넘는 반공포로들이 북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UN군 측은 포로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하여 인도주의적 송환원칙을 주장하는 반면 공산군 측은 포로 전원을  무조건 강제송환 할 것을 주장함으로서 휴전회담은 또 다시 정체상태에 빠졌다. 이때부터 전쟁은 일면협상 일면전투라는 새로운 양상 속에서 1952년 한해를 보내게 됐다.


1953년에 접어들어 소련 수상 스탈린이 사망하게 되자 공산군 측은 곧 휴전회담의 재개를 요청해 옴으로서 그 동안 지지 부진했던 휴전협상은 급진전됐고 4월에는 부상당하고 질병에 걸린 병상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휴전협상이 급속히 진행되자 남한에 국민들은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하기 위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이승만대통령도 반공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시켜 휴전협상의 진전을 가로막았다.


이 때문에 휴전회담은 한때  파국에 직면했지만 전쟁의 종식을 원하는 쌍방에 견해는 여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UN군 측을 대표하는 미군의 해리슨제독과 공산군 측을 대표하는 북한군의 남일이 휴전협정을 조인했다.


그리고 이 날 오후에는 휴전을 반대했던 한국이 제외된 상태에서 UN군 사령관을 비롯하여 북한 인민군 최고 사령관과 중국지원군 사령관이 휴전협정서에 최종적으로 서명했다. 이로써 3년1개월2일간에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밤 10시를 기해 전 전선에 걸쳐 전투 행위가 멈추게 됐다.


휴전협정에 따라 전쟁에 결과로 남았던 포로교환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분단에 장벽은 38도선 대신 155마일 휴전선이라는 이름으로 군사 분개선이 그어짐으로써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휴전의 상태에서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전쟁의 불씨로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다.


 

↑1951년 7월 10일 전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유엔 측에게 주어진 과제는 협상테이블에서 영예롭게 전쟁을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협상은 처음부터 난간에 부딪혔다. 개성에서의 1차 회담은 서로간의 인식 차이만 확인하였다. 휴전회담으로 사용된 한옥건물 ‘내봉장’ 내봉장은 대청마루와 방들 사이를 연결한 99칸짜리 멋쟁이 한옥 건물이었다.



 

 휴전회담 기간 중 공산측이 유엔 측 대표단에게 숙소를 제공한 ‘인삼장’ 그러나 조이 수석대표는 문산리에 숙소가 준비돼 있음을 알리고 이를 거절했다.

 

 

↑중립지역 침범에 대한 논란으로 중단되었던 회담은 1951년 10월 25일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재개되었다. 따라서 현 전선을 분계선으로 할 경우 개성은 북한 측 수중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널문리’ 들판에 세워진 판문점 휴전회담장. 중앙에 있는 두 개의 큰 텐트가 회담이 열린 장소였고 그 옆 오른쪽의 텐트들은 유엔 측 대표단이 사용한 것이었다.


                                                     

                                                                   정전 협정문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김일성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유엔군 사령관


5. 포로 교환 및 방공포로 석방.


1]. 포로교환.


북한 측은 유엔군 포로들을 주로 압록강 부근에 수용했고, 공산측 포로들은 거제도에 수용되었다. 거제도는 차츰 거대한 포로도시가 되어갔다. 사실 포로교환문제는 국제법상으로는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포로가 송환을 원치 않은 상황은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거제 포로의 상당수가 강제 징집된 남한 출신과 장개석의 국부군 출신이었고 대부분이 송환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 문제가 난제로 등장하였다.


2]. 방공포로 석방.


한국전쟁 중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많은 수의 포로가 생겨나 수용시설이 부족했다. 1950년 11월 27일 거제도에 360만 평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이 시설에 북한군, 중공군등 약17만 3천여 명을 수용했다. 그들 포로 중에는 남한에서 북한의 선전에 속아 아니면 강제로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끌려가서 북한인민군에 입대한 후 포로가 된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친공 포로와 반대되는 반공포로였다.


이들은 막사도 따로 쓰고 서로서로 폭행하여 수십 명을 살해하는 일도 빈번 했다. 친공 포로들 중에는 일부러 포로가 되어 들어온 인민군장교가 있어 친공 포로들을 단결시켜 수용소 안에서 시위도하고 수용소장인 미군준장 도널드를 납치하고 그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개선, 자유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방침을 철회하고 무조건 포로전원을 북으로 송환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1953년 6월 8일 유엔군과 북한군, 중공군과의 판문점휴전회담에서 체결된 포로송환 협정에는 귀향을 원하는 포로만을 휴전 성립 후 60일 내에 송환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는 휴전을 할 수 없다고 휴전회담에 참석을 하지 않았다.


휴전이 성립되기 직전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한미 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그 협정을 인정 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또 친공 포로가 아닌 반공포로는 이북으로 보낼 수 없다고 하여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3만여 명을 국군헌병을 시켜 비밀리에 석방시켰다. 이 사건으로 세계는 경악했다. 미국은 비협조적인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려고 까지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그 후 북으로 송환되던 친공 포로들이 휴전선에서 유엔군이 제공한 옷가지를 벗어서 던지는 추태를 벌였다. 너희가준 더러운 옷은 안 입겠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 옆에는 인민군 병사들이 박수도 치고 한영하면서 서 있었다.
물론 몇 년 전까지도 남측에 구조된 어부들도 송환 때 벌인 추태인데 그렇게 까지 해서 북한에 충성심을 보이려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 북에 가서 환영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여자 포로수용소


 

포로 폭동진앞


친공포로에 사살된 반공포로들

  

        사진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경. 51년부터 발생한 포로들의 집단폭동사건

이후 재분리 수용과정에서 이중으로 된 높은 철조망을 둘러 경비를 강화했다.(1952.5.7)



제2장. 6.25 한국전쟁 근원[根源]과 피해상황.


1. 북한의 남침을 위한 계략.


한반도에서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남쪽은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분단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것이 미국과 소련의 이념대결로 인해 자기네가 선호하는 자기 측에 유리한 인사를 점령지역의 통수권자로 만들고 미군과 소련군은 철수했다.


이때 북한의 김일성은 남한을 무력 침략하여 통일하려고 소련의 당시 스탈린에게 무기원조를 요청 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의 참전으로 다시금 세계전쟁으로 확산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김일성은 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력에 의한 통일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며 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의 선언으로 불리는 ‘태평양 방위선언’ 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호기였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1949년과 1950년 두 차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에 대한 승인과 전쟁지원확약을 받았다. 이때 서명한 비밀각서가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돼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소련이 남한을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

공산화하기 위한 계획을 러시아어로 기록한 문서이다.


1945년 8월 9일[해방 6일전]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1945년 9월 8일[해방23일후]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 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에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 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독립의 기쁨도 우리나라는 미소간의 이념대립과 의견차이로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된다. 남한은 미군이 진주해 직접 3년간 미군정을 실시하고 소련은 북한에 진주해 김일성 정권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군정을 실시한다. 미군정이 시작될 때부터 김구, 김규식 등은 남북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나 1949년 김구가 안두의‘에게 피살됨으로써 그 세력은 없어지게 된다.


김일성은 소련을 찾아 탱크 등 많은 군수물자를 지원받고 조국통일이라는 명목 하에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남침을 개시하였다.


2. 6.25 전쟁 직전에 미‘소군이 한국에 있었는가?


1945.8.9 종전 6일 전에 소련군도 일본에 선전포고 한 후, 1945.8.26 해방직후 소련군은 북한 쪽으로 평양에 입성 하였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남북 간의 당파싸움은 미‘소를 등에 업고 쟁탈전이 시작되어 결국은 원한의 삼팔선이 그어졌다[1945,9.2]


* 1949년 미, 소군은 남한과 북한의 민정에 정권을 이양하고 완전 철수 하였었다.

그때도 오늘날과 같이 남북 간에 달콤한 통일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련군도 철수하였으니 미군도 철수하도록 유도하고, 협상의 방심을 노려 북한은 6.25 남침을 자행 하였다.


3. 6.25 전쟁 시 미군이 언제 참전 했는가?


1950.6.25 북한군의 남침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

1950.7.1. 부산에 미 스미스부대가 도착 하였으며

1950.7.7. UN안보리를 통과 UN의 16개국이 참전 하게 되었다.

1950.7.17. 한국군의 지휘체계가 미흡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작전 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사령관[맥아더]에게 통합 운영토록 위임 했었다. 그러나 2달 후 낙동강 후방 대구와 부산만을 남기고 전 국토가 점령당한 후 1950년.9월.15일. 맥아더 장군 인천 상륙작전과, 16개국의 UN군이 참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4. 휴전 협정은 누구와 왜 했는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세계대전을 우려한 트루먼 미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귀국 조치하고, 다시 38도 선으로 후퇴 한 후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UN군. 중국군. 북한군. 과 '휴전협정'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당시 한국은 휴전을 반대하여 휴전 협정에 참석하지 안했었다.


휴전 후 1994년 12월 1일 평시작전통제권은 우리 군이 환수하여 현제 단독 운영하고 있으며 전시작전 통제권만 한미연합사가 미군과 한국군이 공동으로 현제까지 운영하고 있다. 한미연합사 사령관은 미군이 부사령관은 한국군으로 임명되어있다.


5. 6.25 전쟁으로 '사상자'는 얼마나 났는가?


한국군 : 32만 명

미  군 : 14만 명

UN군  : 1만 6천명[미군별도]

북한군 : 63만 명

중공군 : 92만 명

남, 만간인: 99만 명

북, 민간인: 200만 명

남북이산가족: 1000만 명 [이 기록은 전쟁기념관 자료임]

 

 

동부전선에 대한 중국군의 전면 공세는 서부보다 늦은 11월 하순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맞선 아군들은 두개의 적과 싸워야했는데 하나는 살인적인 추위였고 끊임없이 나타나는 중공군이었다. 사진은 고도리 합동매장소로 이송돼 오는 미 해병전사자들(1950.12.8)

 

                     

 [어머니 시신 곁에서 울부짖는 전쟁고아.]                           [중공군 시체를 확인하는 미3사단 병사.]

 


                       

       [북한군에 학살당한 민간인.]                                          [학살당한 시체 앞에서 울부짖는 가족.]



6. 한국전쟁에 UN군의 참전한 나라는?


[16개 참전국]

1.미국, 2.영국, 3.오스트레일리아, 4.뉴질랜드, 5.룩셈부르크, 6.터기

7.남아공, 8.타이, 9.필리핀, 10.콜롬비아, 11.캐나다, 12.에티오피아,

13.프랑스, 14그리스, 15.네덜란드, 16.벨기에


 

한국전쟁에서 남한 군을 돕기 위해 UN 참전 16개 국기.



 



***하늘도 땅도 모두 울었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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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Ⅰ부. 6.25 한국전쟁.[차레]


제1장. 한국전쟁의 진실.

1. 한국전쟁 개요.

2. 북한의 기습남침.

3. 유엔군 과 아군의 전황.

 1]. 낙동강 최후저지 작전.

 2]. 인천 상륙작전.

4. 중공군 개입과 휴전협정.

 1]. 중공군 개입.

 2]. 휴전협정 조인.

5. 포로 교환 및 방공[防共]포로 석방.

 1]. 포로교환.

 2]. 반공포로 석방.


제2장 6.25 한국전쟁 근원[根源]과 피해상황.

1. 북한의 남침을 위한 계략.

2. 6.25. 전쟁 직전에 미, 소군이 한국에 있었는가.

3. 6.25. 전쟁 시 미군이 언제 참전 했는가.

4. 휴전 협정은 누구와 왜 했는가.

5. 6.25. 전쟁으로 '사상자'는 얼마나 났는가.

6. 한국전쟁에 UN군의 참전한 나라는.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