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Ⅳ부. 공산주의 특징.

 

제1장. 공산주의 몰락.

 

1. 공산주의.

 

1]. 공산주의 유래

오늘날 공산주의라고 할 때는 문헌에만 남아 있는 죽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킨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840년대 이후 서유럽에서 K.마르크스와 F.엥겔스에 의하여 창시된 마르크스주의를, 레닌이 20세기 초 러시아의 특수한 조건하에서 발전시킨 사상 및 이론의 체계와 실천운동으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즉 공산당(共産黨)이 수립한 과거 소련· 동유럽· 중국대륙· 북한· 인도차이나반도 등지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말은 엄밀한 구별 없이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 마르크스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와 구별하기 위하여 '공산주의'라고 하였다. 그는 1875년에서 계급 없는 공산주의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공산주의를 '보다 낮은 단계'와 '보다 높은 단계'의 2단계로 구별하였다.

제1단계는 아직 초보적 단계로서 여기에서는 완전한 분배상의 평등은 실현될 수 없으며, '개인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그리고 제1단계는 완전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로서 계

 

급적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레닌은 이 공산주의의 제1단계를 '사회주의'라고 규정하였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하여 수립되는 '사회주의' 정권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정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레닌 이래로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강령으로 하지 않는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거부하는 사회주의는 결코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는 전통을 세웠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라는 용어도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 사이에서는 전혀 별개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공산주의의 제2단계, 즉 '보다 높은 단계'는 생산력의 높은 발전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개인이 분업(分業)에 노예처럼 예속되는 상태가 소멸되며, 따라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가 없어지고, 노동이 단지 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생활의 '제일의 욕구(欲求)'로 되고, '개인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낭만적인 공산주의의 미래상은 20세기를 관류(貫流)한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그 종주국인 소련이 시장경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 연방을 해체하였으며, 이어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몰락한 90년대 초까지 그대로 잔존한 공산국가들의 절박한 현실을 볼 때, 이른바 과학적 공산주의가 꿈꾸었던 그러한 미래는 도저히 도래할 수 없을 것 같다.

<출처 : 네이버 지식인 인용>

 

2. 소련의 공산주의 종주국 패망.

 

1]. 공산주의를 혁파한 고르바초프.

1931년에서 현재까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주역으로 소련을 변화시킨 지도자 고르바초프의 탄생지는 북카프카스의 스타브로폴이 지방의 돈 강과 불가강의 하류에 끼인 비옥한 대초원 지대였으며, 기후는 비교적 온난하고 풍광이 아름다웠다.

 

그는 프리포리노에라는 마을에서 1931년 3월 21일에 태어났다. 양친은 농민이었고 고르비(고르바초프의 애칭)가는 북카프카스지방에 오래 살아왔던 러시아 민족 출신이었다. 이 지방의 러시아인은 여러 민족의 피가 혼재된 때문인지 상상력이 풍부하고 호기심이 강한 반면 그리 사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조부는 공산당원으로서 1931년 프리포리노에에 만들어진 최초의 집단 농장(콜호스)창설자였으며 그의 부친 세르게이는 최초의 트랙터 운전 기사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군에서 근무하였고 퇴역 후에는 고향에서 당고문 역할을 하다가 1976년에 사망했다. 모친 마리아 할텔 에브나는 1990년 당시 80세의 노령으로 생존해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신발을 사서 신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1945년 그의 나이 14세가 되던 해 중등 교육을 받으면서 고향의 기계 트랙터 스테이션(MTS)에서 임시 고용되어 콤바인 운전조수로서 일하였으며, 18세 때에는 이 마을에 지시된 농작 계획을 초과 달성했다 하여 노동적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은 고르비가 반짝거리는 재능은 없지만 지적으로 뛰어나고 어떤 과목에도 흥미를 갖는 만능 소년이라고 했다. 그는 1950년에 들어가기가 하늘에 별따기라는 모스크바 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 재학 중 21세 때 공산당에 정식 입당하였다. 그때가 스탈린이 사망하기 3개월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공산주의 사상에 불타고 있는 청년 스탈린주의자였다. 이렇게 고르비가 여러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반면, 때로는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있어 위험 요소도 아울러 있었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고르비의 4대 특장점으로, 첫째 용기 있는 실험자, 둘째 재빠르게 적을 숙지하는 능력의 소유자, 셋째 자기 능력의 한계를 볼 줄 아는 사람, 넷째 목표를 낮추지 않고 유지하는 전략가라고 했다.

 

고르비는 또한 뛰어난 웅변가로서 레닌 이후 최고의 웅변가라는 명성이 자자했다. 고르비가 웅변에서 자주 인용한 말은 헤겔의 '진실은 항상 적극적이며 현실적이다'로서 헤겔이 변증법에 호감을 갖고 있어 논문이나 연설에서 자주 인용했다.

 

1968년 1월 두브체크가 체코 공산당 제1서기로 선임되고 소위 '프라하의 봄'이라고 일컬어지는 체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당시의 소련 공산당 제1서기인 브레주네프는 그 해 8월 탱크로써 무자비하게 탄압해 버렸다. 그때 두브체크의 민주화 운동의 주요 내용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건설이 목표였으며 그 구체적 정책 방향은 사상, 언론의 자유, 검열의 폐지, 복수 정당제 허용, 자유주의적 시장 경제 체제로의 개혁이었다.

 

이는 마치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거의 같다 할 수 있다. 체코의 '프라하의 봄'을 본 고르비는 그때부터 이미 모스크바의 봄을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70년 4월 고르비는 스타브로포리 지방당의 제1서기로 취임하였고 78년 그가 47세일 때는 마침내 중앙당 농업 담당 서기로 발탁되어 중앙 무대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고르비의 첫 외유는 체코의 두브체크 정권 붕괴 직후 소련 당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프라하를 방문한 것이었다. 고르비는 1989년 12월 말타 에서 부시 미 대통령과의 회의 직전에 바티칸 교황청을 방문하고 기자 회견을 통해서 1968년의 소련 브레주네프 정권 당시의 체코 침공은 잘못이었음을 시인하고 브르주네프의 결정을 비판했다.

 

소련은 브레주네프 사망(1983년 11월) 후 안드로포프가 뒤를 이었고 그 후 체르넨코가 집권했다. 그들은 모두 건강이 좋지 않아 권좌에 오래 있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5년 체르넨코의 후계자를 정하는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가 중앙당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 후 1989년에 폴란드에 민주적 정권이 탄생하자 동구 각국의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일었고, 서구 관측통들은 소련이 예전처럼 군사 개입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고르비는 일체개입이나 간섭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민주화 개혁을 환영하였다. 그러자 개혁을 주저하며 소련의 눈치만 보고 있던 많은 동유럽 공산 국가와 동독도 체제 변화와 개혁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과 결과는 강대한 권력 기반을 가진 고르비라는 존재 없이는 불가능한 일로서 실로 엄청난 시대의 변화라 아니할 수 없다. 1989년 11월 이탈리아 방문 수일 전에 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게재된 고르비의 논문에서 그의 새로운 정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논문의 제목은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였다.

 

그 논문에서 그는 '우리들이 오늘날 이해하는 사회주의 사상은 무엇보다도 자유의 사상이다. 사회주의의 새로운 얼굴은 인간적인 얼굴을 갖는 인간적 사회주의건설이다'라고 밝혔다. 이 논문에 대해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 때 일부 보수 교조주의자는 브레주네프 시대의 반 체제파 견해와 동일하다는 이유로 고르비를 비판하였다.

 

고르비의 종교관은 앞서 말한 그의 로마 교황청 방문에서 엿볼 수 있는데,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와 가톨릭교회의 정상 요한 바오로2세 교황과의 면담은 구체제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로서 당시 언론들은 역사적 화해라고 대서특필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고르비의 개혁에 관심을 표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지키고 조장하는 개혁을 지지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는 교황이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질적으로 지지하는 선언이었다.

 

고르비의 세계관은 어떠했는가?

1988년 12월 7일 제43회 UN총회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흐루시초프 이후 소련 최고의 지도자로서 처음으로 그는 이 연설에서 전 인류적 이익, 전 인류적 가치의 우선 선택의 자유, 국가 관계의 탈 이데올로기화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개개의 민족성과 전통을 초월한 그의 선견성을 엿볼 수 있는 이 연설에서, 그는 공동의 창조, 공동의 발전을 위한 협력을 중시하면서 타인을 희생으로 하는 발전의 정식을 버릴 것을 주장했고 무력과 무력에 의한 위협이 이미 대외 정책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했다. 또한 국가의 사회 발전은 자본주의든지 사회주의든지 선택의 자유라는 보편적 원칙에 따라 정해져야 하며 이 원칙에 따라 동구의 민주화 개혁에 대한 군사 불간섭은 당연한 결과라고 했다.

 

1960년대 흐루시초프의 UN연설은 시종일관 공산주의 선전이었으나 고르비는 연설 도중에 단 한 번도 공산주의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1990년 1월 1일자 '타임'지는 고르비를 80년대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 잡지는 고르비는 놀랄 만한 상상력과 대담성을 가지고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슈퍼스타라고 했다.

 

그는 경제 개혁보다 정치 개혁을 선행시켰으며, 그것은 정치, 사회, 문화 등 다방면의 개혁과 의식 혁명이 세상 고쳐 나가기의 핵심이며, 또한 소련 재생에 그것이 우선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결국 공산당 1당독재 포기와 이에 대치되는 민주적 대통령제 도입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치 개혁으로 초대 대통령이 된 고르비는 그 전도가 다사다난했으며 강력한 권력을 지니는 동시에 그 책임 또한 막중함을 면할 길이 없었다.

 

고르비 정권 5년 치적을 대충 훑어보면 체제의 비스탈린화, 스탈린 숙청 희생자의 복권, 최고 회의의 개편, 자유선거의 확립, 복수 정당제, 사적 소유 도입, 정치범의 석방, 검열의 폐지, 출입국 관리의 완화, 파업 권리의 보장, 망명자의 귀국 허가, 형법 개정 등 법제 개혁, 그리고 KGB의 활동 제한과, 외교면 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철수, 냉전의 종결, 미소, 동서 관계의 개선, 군축, 브레주네프 독트린 파기, 체코 군사 개입의 사죄 등을 들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종래의 어두운 소련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레이건, 부시 전 현직 미 대통령, 대처 영 수상,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콜 서독 수상 등 유력한 서방 정치가와의 접촉을 통한 개인적 신뢰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그가 소련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취임 연설에서 "나는 씨앗을 심지만 수확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 사회의 개혁에 필요한 여러 씨앗을 많이 심어 두어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라고 했다. 이 연설은 마치 곧 닥칠 자기의 운명을 예고한 듯했다.

 

1991년 8월 12일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 겐나 디야니에프 대통령 권한 대행, 올레그 바클라노프 국무 위원장 제1열 의장이 주도한 고르비 축출 보수 강경파 쿠데타에 의해 고르비는 실각한다. 그 쿠데타도 3일 만에 실패로 끝나 고르비는 다시 권좌에 복귀했으나 그는 공산당 제1서기직을 사임하고 공산당도 해체했다. 그 후 그의 통제력은 급격히 약화되어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해체가 가속화되었으며 얼마 뒤에 그는 실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표방했던 개혁은 지금도 흔들림 없이 추진되고 있으며, 그가 심은 페레스트로이카의 많은 씨앗은 지금 한창 움이 트고 있다.

 

고르비의 부인 라이사는 1932년 1월 5일 시베리아의 알타이 지방의 루프추오스크 읍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모스크바 대학 시절인 54년에 학생 신분으로 결혼했다. 라이사는 지적 호기심이 대단하여 34세 때 외동딸을 보살피면서 논문을 완성하여 1965년 철학박사 후보학위를 모스크바 교육대학에서 취득하기도 했다. 그 후 1985년 고르비가 서기장에 취임할 대까지 그녀는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평생을 고르비의 정치적 내조자로서 훌륭한 역할을 한 현부인이었던 그녀는 1999년 9월 지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외동딸 이리나는 의사 아니트리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고 있다.

 

세계대전 후 미국과 사사건건 대치하며 냉전 체제를 이끌던 소련의 막강한 구체제가 조직이 아닌 단 한 사람 고르비의 힘으로 무너지고, 그로 인해 세계의 판세가 변했으니 그를 어찌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러시아의 정치 지배 체제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거기에는 두 조류가 흐르고 있다. 그 하나의 슬라브 민족주의(토착주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구적 러시아파로서 지금가지 이 두 조류가 대립 교체하면서 흘러왔다 할 수 있다. 고르비는 여기에서 말하는 소위 서구파에 속한다 할 수 있으며 그는 정계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러시사의 사회적 모순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지금은 페레스트로이카를 고르비의 독창적 정책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으나 실은 브레주네프(1906년에서 1982년까지) 정권 말기에 소련 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해 브레주네프 자신이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고 그 뒤 안드로포프, 체르넨코도 더욱 강하게 역설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어 고르비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페레스트로이카를 치고 나옴으로써 과감한 개혁을 단행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에게는 경제와 사회 개혁에 대한 단단한 청사진이 없었으며 오로지 정치적인 민주화에 치중된 페레스트로이카에만 심취되어 생활고에 지친 소련 인민들에게는 아무런 발전과 도움을 주지 못해 그의 정치적 야망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러한 결과는 정치적 민주화를 국정의 금과옥조로 내세우고 경제는 부수적인 구색으로만 여기던 김영삼 정권과 유사한 바가 있다 할 것이다.

 

고르비 다음에 집권한 옐친(1931년에서 현재)은 고르비 와는 정반대로 본질적으로는 대단히 슬라브적인 토착성이 강한 정치인이라고 학자들은 평한다. 얼굴부터 토착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슬라브족의 얼굴로 러시아인에게는 대단한 친밀감을 주는 표정 때문에 대중들에게 친근한, 기대고 싶은 감정을 쏟게 하는 인물이다.

 

러시아 대중들에게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누가 주었느냐고 물으면 고르비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다. 그 결과 1998년에 실시한 대통령선거에서 옐친의 득표가 30%이상인 반면 고르비는 1%도 채 얻지 못했다. 고르비가 연방을 해체하고 하버드 대학 교수 수준의 경제 정책을 감행하는 바람에 러시아는 IMF 구제 금융 하에서 고단한 삶을 살수밖에 없는 나라가 되었다.

 

연금이나 급료도 제때에 못 받을 뿐 아니라 물가는 폭등하였으니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는가? 이것이 페레스트로이카 정치란 말인가? 이렇게 팽배된 인민의 감정이 폭발했기 때문에 고르비의 표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옐친은 어느 정도 서구의 협력과 협조 없이는 러시아를 재건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서구와의 타협을 유연하게 함과 동시에 슬라브 고유의 민족주의적 대응도 태만히 하지 않아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고르비는 현실을 전적으로 무시한 탓에 소련국민의 노여움을 사서 실각되었다.

 

그 뒤를 옐친이 승계 했지만 그 역시 이렇다 할 정치적 성공을 이루지 못했으며 거기에다 두 번이나 대수술을 받는 등 심각한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후임으로 푸틴을 지명하기에 이르렀다.

고르비는 옛 소련의 독재자와 같이 우레와 같은 박수나 만장일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1당 독재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사나운 폭풍우에 몸을 맡기듯 모든 비판을 한 몸에 받으면서 굳건히 견딘 위대한 세계적 지도자였다.

 

고르비는 여전히 권력에의 미련을 버리지 않고 민주 야당 연합 세력을 규합하여 재도전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하고 있지만 과연 고르비의 말에 귀 기울이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이다. 지도자는 역사가 그에게 맡긴 사명을 다하고 한번 물러나게 되면 다시 옛 지위로 복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금은 혼돈을 거듭하는 뜻하나 언젠가는 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 그리고 많은 인구와 빛나는 문화적 전통 등이 잘 조화되어 정치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선진 자유경제를 구가할 때가 올 것이므로 그 주춧돌을 놓은 사람으로서 고르비의 명성은 다시 부활하여 재조명될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인 인용>

 

3. 동‘서독 통일 과정.

 

1]. 동독의 패망.

 

 동서독 교류협력.

동서독의 통일은 1990년 10월 3일 완결되었다. 독일통일은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것은 아니었고 양독 지역 국민의 합의에 의한 평화통합이었다.

 

동서독은 분단 양측이 비록 이데올로기상으로는 화합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으면서도 꾸준한 교류와 협력을 통해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해 갈 수 있었다. 양독은 교류와 협력관계를 확대해 가던 중, 때마침 동유럽을 휩쓸던 민주화와 개방화의 열풍에 편승, 평화통일을 재빨리 얻어낼 수 있었다.

 

동서독의 통일은 동독이 민주화되고 개방화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 이 추진하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으로 동구의 공산국들은 소련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화와 민주화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동구에 자주화와 민주화의 거센 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동독의 1천 6백만 국민들도 개혁의 대열에 나섰다. 결국 민주화에 성공한 동독 주민들은 그 여세를 몰아 서독으로의 편입을 스스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동서독의 통일은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합 한 것이라기보다는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통합 되기를 자원하고 나섰다는 특징을 지닌다. 공산독재체제 속에 묶여 탄압과 빈곤 속에 허덕이던 동독주민들이 개방물결을 타고 자유와 번영이 넘쳐흐르는 서독으로의 편입을 자청한 것이다.

 

원래 독일은 1945년 5월 8일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국들에 의해 4개 지역으로 분할 점령되었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서방진영과 소련간의 냉전체제가 격화되어 가면서 미. 영. 불 3개 서방 강대국들은 점령지역을 하나로 통합, 1949년 9월 7일 독일 연방공화국을 만들어냈다.

 

서독이 그것이다. 이어 소련도 1949년 10월 7일 자신의 점령 하에 있었던 지역에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동독을 창출해 냈다. 독일은 다행스럽게도 4개 지역으로 분할점령 되었으면서도 단일경제권으로의 통합이 점령국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미. 영. 소 3개국은 1945년 7월 17일 부터 8월 2일 까지 속개된 포츠담회담에서 독일의 4개점령 지역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하며 주요 상품들을 균등히 배분하여 평등한 생활을 보장하자 는 데 합의하였던 것이다.

 

이어 1946년 미. 영. 불 서방 3개국들은 소련과 각기 점령지 물품교역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서방 3개국들은 1947년 1월 자신들의 점령지역을 하나의 경제. 행정구역으로 통합했다.

 

이렇게 하여 독일은 비록 4분되었지만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으려는 노력이 점령 국가들에 의해 처음부터 시도되었다. 그러나 분단 독일의 단일경제권은 1948년 6월 24일 부터 1949년 4월 12일 까지 지속된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계기로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분단 독일의 경제교류는 1949년 9월과 10월 각기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다시 재개되어 날로 확대되어 갔다. 서독은 정부수립 31일 만에 그리고 동독은 건국 하루만인 1949년 10월 8일에 서로 프랑크푸르트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은 동서독이 두 지역 간의 편의를 위해 양독 중앙은행들을 지불청산기관으로 설정함으로써 상품교역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서독은 프랑크푸르트협정을 필두로 통일될 때까지 수많은 협정들을 체결해 가면서 경제교류를 활성화 시켜갔다. 양독의 교역은 앞서가는 서독측이 뒤처진 동독을 도와주는 불균형관계였다. 우선 서독은 동독과의 화폐환율에서 밑지고 들어갔다.

 

서독 마르크와 동독 마르크의 실제 구매력은 4;1로서 서독 마르크가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동독과의 교역 거래에 있어서 1:1의 비율을 적용해 주었다. 서독이 4배나 손해를 본 셈이다. 무역거래에 있어서도 1988년의 경우 서독은 45억 달러 수출에 47억 달러 수입으로 2억 달러의 적자를 보았다.

 

뿐만 아니라 서독은 수억 달러씩 동독에 저리로 차관을 해주었다. 무이자 아니면 기껏해야 연리 4%정도 로 서독 마르크를 빌려준 것이다. 그 밖에도 서독은 동독내의 정치범을 빼내기 위해 엄청남 몸값을 지불했다. 1인당 3만 5천 달러 내지 7만 달러가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독은 1962년 - 82년 사이에 1만 9천명의 정치범들을 동독으로 부터 사들였다. 이를 위해 서독은 10억 달러의 몸값을 건넸다고 한다.

 

또 서독은 동독을 여행하는 자국 국민의 도로사용료도 부담하였다. 10년간 서독은 3억 5천만 달러를 동독에 지불하였다. 이와 같은 서독의 경제적 지원책으로 인하여 동독의 서독 의존도는 40%로 증대 되었고 서독의 동독 의존도는 10%에 불과했다. 결국 서독의 튼튼한 경제력이 동독을 흡수하게 된 주요 원동력이 된 셈이다.

 

 서독의 동독민주화 정책

서독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동독지원은 단순한 동족에의 발양에 바탕 한 것만은 아니다. 동독 공사독재 체제에 얽매

인 동족의 인권과 복지 그리고 민주화를 유도해 내기 위한 데 있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서독은 공산독재체제에 항거하다 체포된 동독인들의 인권과 자유로운 삶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독은 동독에 대한 마르크 차관조차도 동독인들의 인권과 자유 향상 을 위해 연계시켰다.

1983년 서독은 동독에 10억 마르크의 차관을 공여하면서 그 대가로 서독은 동독 측이 1천 4백 km에 달하 는 국경선에 설치해 놓은 기관총좌와 지뢰의 3분의 1을 철거토록 유도하였다. 이어 서독은 1984년 9억 5천만 마르크의 차관을 동독 측에 대여해 주면서 동독이 서독여행제한을 크게 완화시키도록 하였다.

 

특히 동서독을 통합시키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던 헬무트 콜 서독총리는 통일의 조건으로 동독의 자유화 와 개방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콜 총리는 기회 있을 때 마다 양독이 통일되려면 동독이 서독처럼 민주화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1989년 봄부터 동구 여러 나라에서 민주화. 개방화의 열풍이 불어 닥치고 있는 데도 유독 동독에서만이 그러한 바람이 일지 못하자 콜 총리는 동독의 민주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는 동독정부가 동독인들의 대규모 서독탈출을 막기 위해서는 헝가리와 폴란드를 본받아 민주적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1989년 8월 22일 촉구했었다.

 

이어 89년 10월 21일 콜총리는 독일 통일의 관건은 동독의 자유 인권. 자결권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동독의 민주주의에는 개인의 자유보장만이 동독인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통일선택을 보장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명백히 지적하였다.

 

콜 총리는 동독에 대한 대규모 경제원조도 동독의 민주화와 연계시켰다. 그는 1989년 11월 8일 동독이 자유선거와 복수정당제를 실시하고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포기해야만 대규모 경제 원조를 제공할 수 있다 고 동독의 민주화를 선결조건으로 요구하였다.

 

그는 동독에 정치 및 경제의 획기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것은 서독의 국가적인 의무라면서 전체의 독일인들이 민주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동서독 재통일의 전제조건이라고 못 박았다.

 

사실 동서독의 교류와 협력이 간접적으로 동독주민을 상대로 민주화와 개방화 욕구를 자극했으며 서독의 자유와 풍요에 대한 동경심을 불어넣어 끝내 서독으로의 흡수통합의 기반을 다져준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행히도 동서독은 2차 대전 후 4강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면서 단일경제권으로 통합돼 두 지역 간의 경제교류가 활성화 될 수 있었다. 양독 간의 경제교류는 동독인들에게 서독제품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 동독체제에 대한 불만과 서독에 대한 기대치를 상승케 하였다.

 

그 밖에도 동서독간의 우편. 통신, 인적교류는 동독주민들의 서독에 대한 동경심을 더욱 드높이는 작용을 하게 만들었다. 동독인들에게 자유와 번영이 서독 바람을 불어넣는 촉매제 역할을 해낸 것이다.

 

동서독은 1945년 분단되었지만 양측 지역 간에는 변칙적으로 체신교류가 가능했다. 다만 61년 8월 동독 이 베를린장벽을 구축하면서 동서독간의 변칙적인 체신교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곧이어 재개 되었다.

 

동독은 1948년~68년 사이의 우편. 전신 사용료로 서독 측에 18억 마르크를 요구했을 정도로 두 지역 간에는 분단 초기부터 체신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서독은 1971년 9월 체신교류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 양독간의 전화회선을 크게 늘렸다. 동서독 간에는 자동전화선이 매년 폭증해 갔던 것이다.

 

 동서독 기본 조약 발전.

동서독은 분단된 상태에서도 교통망을 계속 연결해 사용하고 있었다. 동서독 간에는 32개의 철로, 3개의 고속도로, 31개의 연방도로, 그 밖의 공공도로들로 연계되어 있었다. 이 교통망은 1948년 6월 49년 4월 사이의 베를린 봉쇄당시 전면 차단된 바 있었으나 그 후 곧 재개되었다.

 

물론 동독은 서독이 1백 70km 동독영토 깊숙이 박혀있는 서 베를린과의 통로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라고 간주,1951년부터 도로사용료를 서독으로부터 징수해 내기 시작하였다. 동독은 서독여행자들 을 상대로 과잉검사를 하는가 하면 화물차의 경우 화물수색으로 운송을 지연시키는 등 불편을 야기하기 도 하였다.

 

1955년 동독은 서독과 서베를린간의 자동차도로세 징수를 제기한 바도 있었다. 1972년 5월 동서독은 교통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국제관례에 따라 호혜주의원칙에 기초한다는 것을 명시 하였고 철도, 자동차교통, 하천교통, 해운 등의 교통에 관해 규정하였다. 동서독은 교통조약을 계기로 두 지역 간의 교통이 더욱 간편하고 편리해져 교류와 협력을 더 한층 원활히 증대시킬 수 있었다.

 

동서독 간에는 인적왕래도 처음부터 가능하였다. 동독 부모형제에 한하여 연간 1회 4주 서독 거주인 들의 동독여행을 허가하였고 일반 주민들에게는 1일간 동베를린 체류를 허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독은 동독 내 박람회 참가나 상용여권에 의한 여행 또는 동독 공공기관으로부터의 초청장을 소지한 사람들에게는 제한 없이 입국을 허용하였다.

동서독의 인적교류에 제한적인 규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분단초기부터 연간 1백만 명 이상의 교류가 가능하였다. 1960년 1백10만 명이던 교류인원이 70년엔 1백 25만 명으로 늘어났고. 1972년에는 1백 54만 명으로 불었다. 그러다가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 민주공화국 관계의 기본원칙에 관한 조약이 발효된 1973년에는 동서독 여행자가 2백 27만 명으로 뛰었다. 통일 전 동서독간의 인적왕래는 5백만 명에 달 하였다.

 

동서독은 기본조약체결 이전에 이미 통행협정을 만들어 양측 간의 여행절차를 보다 쉽게 간소화한 바도 있다.1971년 12월 체결된 동서독 통행협정은 여행자 보호, 인적 왕래 절차의 간소화, 화물수송절차의 완화, 교통편의 개선, 교통위원회 설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동서독 교류과정에서 가장 불편했던 부분이 언론매체의 교환이었다. 동독이 언론을 통한 서독의 자유사상 유입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서독의 공식적인 라디오tv교류는 기본조약이 발효된 1973년 이후부터 가능해졌다.

통일전 1988년 현재 서독의 수도 본에는 6명의 동독 특파원이 주재하고 있었으며 동독의 동베를린에는 19명의 상주 서독특파원이 취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독의 3개TV방송국이 동베를린에 지사를 설치, 현지 방송을 함으로써 85%의 동독지역이 서독 TV 시청권으로 들러 갔다. 라디오 는 1백% 가청권으로 확대되었다.

 

이미 동독주민들은 1972년의 기본조약 발효 이전부터 서독의 TV와 라디오를 시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독 당국은 서독의 TV라디오전파를 막으려 했으나 1천 4백KM에 달하는 국경선을 모두 봉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동독인들은 분단 초기부터 서독의 전파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동서독은 1972년 11월 8일 독일 연방공화국과 독일 민주공화국 관계의 기본원칙에 관한 조약을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상호 무력사용을 포기하고 모든 국가의 주권 평등 독립자주, 영토보존, 인권보호 차별대우금지 등을 지향한다고 선언하였다.

 

동서독 기본조약은 또 군비제한과 군비축소 노력을 지지하고 경제 학문 기술통행 법률 부분의 교류, 우편전화 보건 문화 스포츠 환경보호 등의 분야에서 협력을 촉진하고 발전시키는 협정을 체결키로 하였다. 양옥은 상주대표부를 상대편의 정부 소재지에 교환 설치한다고 밝혔다. 이어 동서독은 과거 양국이 각기 체결한 조약 또는 두 나라에 관계되는 2국간 혹은 다국 간의 조약에 관한 한 이 조약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동독 붕괴와 자유선택

동서독의 기본조약은 양독 관계를 한층 더 밀접한 관계로 승화시켰다. 기본조약 체결 이전의 양독 사이가 미수교국간의 불편한 관계였다고 한다면 조약체결 이후에는 선린 우호 렵력 체제로의 진입을 의미하였다.

궁극적으로 동서독 기본조약은 양독 간의 교류와 협력을 증대시켜 상호간의 불신을 씻어내고 동족으로서 의 동질성을 회복시켜 1990년의 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해냈다. 동서독의 90년 통합은 이와 같은 양측의 협력증대와 사회구축 없이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동독에 민주화와 개방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고 해도 두 분단 당사자 간에 교류와 협력의 길이 막혀 있었고 그로 인해 불신과 긴장의 벽이 그대로 짓누르고 있었다면 서로는 그처럼 89년 말처럼 서슴없이 다가서기 어려웠으리라는 데서 그렇다. 동서독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국경선만 존재 했었을 뿐 생활상으로는 사실상 통일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그러면서도 동독은 그때 까지도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서기장의 철저한 독재 하에 갇혀 있었다. 동독에는 자유와 개방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동독 주민들이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는 한 평화통일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은 호네커 서기장의 강요에 따라 동독이란 노동자의 낙원이요 분단국 아닌 주권독립국이 므로 더 이상 통일 문제는 존재치 않는 것으로 믿어야 했다.

 

그렇게 철저히 관리되던 공산국가 동독에도 자유의 바람은 거세게 일기 시작하였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 열풍을 타고 폴란드 헝가리 체코스로바키아등에 민주화와 개방화의 함성이 일면서 이웃 동독으로 옮겨 붙었던 데 연유했다.

 

동서독 통일의 길은 1989년 가을 동독인들의 집단적인 서독으로의 탈출로부터 뚫리기 시작하였다. 그해 9월부터 10월 초 사이 10만 명에 달하는 동독인들이 헝가리 폴란드 체코주재 서독대사관 또는 동서독 국경선을 통해 서독으로 도망쳐 나왔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둘러 처지던 해 20만 7천명의 동독인들이 빈곤과 독재의 경계선을 넘어 자유와 풍요의 서독으로 빠져나왔다. 베를린장벽 이후 89년 봄까지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인들은 63만 7천명 이다. 이들 중 24만 1천 8백 명이 불법으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다. 이 불법 탈출자중 2백여 명은 탈출 에 성공하지 못한 채 동독 경비병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되어야 했다. 그만큼 필사적인 탈출이 자행 되었다.

 

또한 서독으로의 탈출을 거부하며 1989년 까지 동독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반체제 민주화 시위를 격렬 하게 벌였다. 이들은 고르바초프의 애칭인 고르비를 연호하며 자유선거 언론자유 해외여행 자유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는 민주화 데모와 고르바초프의 압력 등으로 호네커 서기장은 18년 동안의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호네커의 퇴임에도 불구하고 반체제시위는 날로 격렬해졌고 11월 4일 1백만 명의 시위군중이 동베를린에 모여들었다. 10월 16일 카이프치히에서 12만 명이 운집 대규모 집단화하기 시작한 민주화 시위는 2주일 만에 1백만 명으로 증폭된 것이다. 데모 군중은 공산정권의 퇴진과 자유총선거를 절규하였다.

 

위기적 상황에 몰린 에곤 크렌츠 동독 공산당서기장은 11월 9일 하오 7시를 기해 드디어 베를린 장벽을 전면 개방한다고 선언, 동서독 장벽의 사실상 철폐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감격에 찬 '쥐드 도이체 차이퉁'지는 밀물처럼 국경선을 넘어 들어오는 동독시민들을 가리켜 사슬이 풀린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다고 적었다.

 

이 순간 동서독은 사실상 통일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남은 것은 통일의 절차뿐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자유왕래가 실현되자 동독인들은 노골적으로 서독으로 편입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들은 우리의 목표는 하나의 독일이다라고 외쳐댔으며 빨갱이는 동독에서 물러가라는 구호를 연호하였다.

 

서독과의 국가연합을 주장하는 플래카드도 나타났고 통일독일 대통령에는 서독대통령 리히야르트 폰 바이츠제거, 유럽대통령에는 고르바초프를 추대하자는 글귀도 보였다.

 

결국 동독 정부는 열화와 같은 국민의 자유총선 절규에 극복 90년 3월 18일 총선을 실시하였다. 여기서 서독으로의 조기편입을 정강으로 내세운 보수정당 독일연합이 4백 개 의석 중 1백 92석을 차지하였고 민주사회당으로 개명한 공산당은 겨우 66석을 건지는데 그쳤다. 통일과 관련 신중론을 펴던 사회민주당 도 88석을 얻는 데 불과했다.

동독의 3.18 총선은 동독인들의 대부분이 서독으로의 흡수통합을 희구하고 있었음을 반영하였다. 그에 따라 동독정부는 5월 18일 서독과 통화. 경제. 사회동맹의 창설에 관한 국가조약을 조인, 그해 7월 1일 부로 서독과 경제 통합을 결행키로 하였다. 동서독의 경제통합은 동독이 공산주의 경제를 포기하고 서독 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 흡수됨을 의미하였다.

 

이어 동독 인민회의는 서독기본법 23조에 의거한 동독의 서독편입일자를 1990년 10월 3일로 결정하다는 결의안을 8월 23일 채택하였다. 찬성 2백 94, 반대 62, 기권 7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동독의회는 서독으로의 흡수통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나선 것이다.

 

독의 서독편입 일자는 서독 기본법상 서독측이 비준 없이 동독의 결정에 의해 확정된다. 동독의 자발적인 서독편입 결의안 채택으로 동독은 1990년 10월 3일 0시를 기해 서독연방에 가입되었다. 이 날은 동서독 통일이 완성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통일독일의 초대 총리에는 콜 서독총리가 유임되었고 부총리 겸 외상도 한스. 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상이 맡았다. 다만 동독의 로타르 데메지에르 총리와 자빈느 폴 인민회의 의장을 비롯하여 5명의 동독정부 지도자 들이 통일독일 정부의 각료로 들어가는데 그쳤다.

 

통일을 이룩한 지 2개월만인 1990년 12월 2일 통일독일에서 총선이 실시되었다. 선거결과 집권 기독 민주당은 총의석 6백 56적중 3백 12석을 얻었고 동독 공산당이던 민주사회당은 고작 16석을 차지하는 것으로 머물렀다. 그밖에 의석들은 사회민주당의 2백 39석을 비롯하여 군소정당들로 분산되었다.

 

                                                    

                  베를린 장벽 잔해                                                                   장벽잔해에 그려진 경계.

 

이와 같은 동서독의 통일방식은 동독이 서독으로의 편입을 자청하고 나선 편입 또는 흡수통합 형태였음을 실증한다. 동독이 공산체제를 버리고 자유민주체제로 흡수된 통일인 것이다. 동독의 서독으로의 흡수 통합은 마치 부도난 부실기업이 우량기업에 자신을 흡수해 주기를 애걸한 것과 같았다. 통일 후 독일은 정치 경제 외교는 모든 면에 걸쳐 통일 전 서독의 기본노선을 그대로 견지해 가고 있다.

 

2]. 동독정권의 패망 일정.                        (처음으로)

동독주민의 탈출 및 베를린장벽 개방

'89. 5. 2 헝가리의 대 오스트리아 국경 일부 철조망 철거를 계기로 동독여행자들이 서독으로 탈출 시작 헝가리, 체코, 폴란드 주재 서독대사관 및 동베를린 주재 상주대표부에 동독 탈주민 쇄도

 

'89. 9. 10 헝가리 정부가 대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 동독 주민의 출국여행을 허용함으로써 9월말까지 3만 명 서독으로 탈출 '89. 11. 9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주요 분야 인력의 서독 이주로 동독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 초래 동독주민의 시위 확산

'88년 1월 로자 룩셈부르그 사망기념행사를 계기로 동독에 대규모 시위 발생

'89년 5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부정으로 인해 저항세력이 조직화되기 시작

'89년 초여름부터 라이프찌히에서 수백 명이 여행의 자유 등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 시작 동 월요데모는 10월 9일에 7만 명, 10월 16일에 12만 명, 11월 6일에 50만 명으로 규모가 커짐 10월말 시위가 동베를린, 드레스덴 등 동독 전역으로 확산.

 

11월 4일 동베를린 시위에는 100만 명이 참가 호네커 실각 및 공산정권의 붕괴

'89. 10. 18 호네커 실각

'89. 12. 1 동독 헌법에서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조항 삭제

'89. 12. 3 동독공산당 중앙위 및 정치국 해체

 

※주민들의 개혁요구가 여행 언론의 자유에서 자유선거 등으로 고조되어 가는데 반해, 동독지도부는 시의적절한 개혁을 거부함으로써 정권의 붕괴를 가속화시킴.

 

 콜 수상의 10단계 통일방안 제시('89. 11. 28)

11월 20일 라이프찌히, 동베를린, 드레스덴 등지에서의 시위에서 "우리는 한 민족이다"는 구호와 함께 통일을 요구 동독주민의 서독이주를 막고, 동독상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통일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 전달 필요

이에 콜 수상은 『조약공동체→국가 연합적 구조→연방식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10단계 통일방안 제시

 

 콜-모드로 정상회담 ('89. 12. 19, 드레스덴)

'90. 4 까지 양독간 조약공동체 형성에 합의

조약체결을 위한 분야별 정부 간 협상 개최, 모드로 수상, 개혁프로그램 제시 자유 평등 비밀 보통의 4원칙이 보장되는 민주적 선거법 제정, 시장경제원칙에 따른 정책변화 및 개혁 추진, 헌법 및 형법 개정, 정치범 석방

'90년 1월말-2월초 제2차 정상회담을 서독에서 개최하기로 합의

 

 동독 최초 자유총선거 실시 ('90. 3. 18)

서독정부의 자유선거 실시 유도

'89년 가을 동독에서 변혁(Wende)이 시작되면서, 서독정부는 동독의 민주화 개혁, 특히 자유선거의 실시를 촉구함. 이를 위한 여행, 언론, 정보, 집회의 자유 보장, 공산당의 권력독점 포기, 정당설립의 자유보장 등의 개혁도 요구 모드로 동독수상은 원탁회의와 협상, 동독의 정치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기총선에 합의(원래 5. 6로 예정) 서독정부는 선거를 위한 물적, 인적측면에서 적극 지원 , 정당과 정치인은 자매정당 조직 및 선거유세 지원 서독 DM의 즉각적인 도입과 조속한 통일을 공약으로 내세운 기민당 중심의 '독일연맹'이 승리, 화폐통합 및 통일과정을 가속화

 

 동 서독 화폐 경제 사회통합의 달성

급진적 통합방안 결정

「先경제개혁 後화폐통합」이란 단계적 통합방안도 고려되었으나, 동독이주민의 증가, 동독주민의 DM 도입 요구, 동독마르크화의 가치상실 등 정치 경제 사회적 이유로 급진적 통합 결정

 

'90년 들어 동독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서독은 단계적 통합에서 조기통합으로 정책 수정

콜-모드로 제2차 정상회담('90. 2. 13-14, 본)에서 콜 수상은 특정한 날짜를 기점으로 하여 동독의 통화단위 및 법적 지불 수단을 서독 마르크화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고 양독간 화폐통합 및 경제공동체 형성을 위한 협상기구인 「공동전문위원회」를 구성 자유선거에 의한 민주합법정부 출범 이후 화폐통합 협상을 적극 추진

'90. 4. 25-5. 17간 6차례 전문가 전체회의 및 소회의 개최

'90. 5. 18 화폐 경제 사회통합에 관한 국가조약 서명

 

 통독을 위한 대외적 측면 해결

'90. 2. 12-13, 오타와에서 나토-바르샤바 회원국 'open sky' 회담 개최, 독일통일과 그 관련국들의 문제해결을 위한 '2+4' formula 구성에 합의

독일통일에 대한 대외적 장애요인 중 가장 큰 것은 통일독일 의 동맹체 소속과 독일-폴란드 국경선 문제였음.

7월 15-16일 독 소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쵸프가 통일독일의 NATO 회원국 잔류에 동의

'90. 9. 12, 4차례 외상회담을 통해 '독일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 (2+4조약)서독, 동독/미, 프, 영, 소련 합의, 서명

 

 독일 통일의 완성

'90. 8. 22 전독총선을 위한 선거협약 체결

'90. 8. 23 동독 인민의회, 동독의 서독편입 결의, 기본법 제23조에 의거, 동독이 '90. 10. 3을 기해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키로 결정

'90. 8. 31 통일조약 체결

서독 각 부처는 동독의 현행 법률을 수집,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한편, 서독법규의 전독일 지역 적용여부 조사 동 서독 부처 간에 협의, 통일조약 조문 작성

'90. 10. 3 독일통일 선포

'90. 10. 4 베를린 제국의사당에서 최초의 전독의회 개최, 144명의 구동독 인민의회 의원도 참석

<출처 : 네이버 지식인 인용>

 

 

4. 중국 개혁 개방과 시장경제.

 

1]. 중국 현대화의 주역 등소평[덩샤오핑]

덩샤오핑이 권력에 있을 때, 서방과의 관계가 확연히 증진되었다. 덩샤오핑은 해외순방을 했고, 서방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났다.

 

카터 대통령은 마침내 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정식 인정했다.

 

덩샤오핑이 이루어 낸 것들 중의 또 하나는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 공동 선언이다.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99년 동안의 조차를 마치는 홍콩에 대하여 덩샤오핑은 향후 50년간 홍콩의 자본주의체제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1국 2체제라고 불리며 이러한 접근방법은 중국본토와 대만이 통합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지는 않았다.                     등소평[덩샤오핑]

                                                                                                                    

중국식 사회주의 덩사오핑의 개혁이 목표는 4대 근대화에 요약되어 있는데, 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근대화, 과학의 근대화, 기술의 근대화이다. 근대화되고 산업화된 국가가 되는 목표를 성취하려는 이 전략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다. 덩샤오핑은 중국은 사회주의의 초기단계에 있고 당의 의무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은 경제 정책 결정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감소시켰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뿐 만 아니라 공산주의 가치관의 우선순위를 하향 조정하여 덩샤오핑은 어떤 정책이 단순히 마오쩌둥이나 더 보수적인 진연과 관계가 없다고 해서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덩사오핑은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과 비슷하다고 해서 어떤 정책을 반대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이 경제 개혁이 일어나도록 하는 이론적인 배경과 정치적 지원을 제공했지만, 덩샤오핑 본인으로 부터 나온 경제 개혁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개혁은 지역 지도자들로부터 소개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종종 중앙정부의 지도방향과 충돌하곤 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성공적이었고 유망하다고 밝혀지면 대규모로 여러 분야에서 채택되었고 종국에는 국가전체에 소개된다. 많은 개혁이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에 의해서 경험된 것들이었다.

 

이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의 패턴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는 대부분의 개혁들이 고르바초프 자신에 의하여 제안되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하향식 접근과 대조되는 등소평의 개혁은 상향식 개혁이 성공의 열쇠였다고 이야기 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덩샤오핑의 개혁은 기술적으로 숙련된 관료들에 의하여 계획된 중앙 집중적 대규모 경제 제도를 소개하였다. 이것은 마오쩌뚱의 대중 선동적인 경제 건설 방식을 버린 것이다. 소비에트 모델이나 마오쩌둥의 모델과 다르게 시작 경제를 통한 간접적인 관리 방식이었고, 이 방법은 대부분 서구 국가의 경제 계획과 조정 매커니즘을 본 딴 것이었다. 절차의 제도화, 경제를 개혁하고 개방하면서, 덩샤오핑은 그 절차를 정형화하여 공산당의 힘을 강화하는 시도를 했다.

 

덩샤오핑의 후속 행보는 지도부가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갖도록 야기했다. 1989년에 양상쿤 대통령은 당시 중앙 군사 위원회의 의장인 덩샤오핑과 협력하여 대통령의 명의를 이용하여 1989년의 천안문의 시위를 진압하도록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과 다른 당의 원로들에게 발탁된 촉망되는 후계자였고 당서기 자오쯔양을 대신할 사람으로 뽑혔다. 장쩌민은 학생 시위대에게 온건하다고 평가되었다. 천안문 사태와 직접적으로는 관련되지 않았지만, 장쩌민은 천안문 사태 후에 상하이에서 비슷한 시위를 예방하기 위한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중앙위원으로 승진되었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장쩌민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놓은 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덩샤오핑의 유산

언론인 짐 로워은 덩샤오핑의 1979년에서부터 1994년의 개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류 복지 향상의 가장 큰 향상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언급한 것과 같이 덩샤오핑의 정책은 사회주의 틀 안에서 외국 자본에 경제를 개방하였고 시장을 개방하였다. 그가 죽고 난 뒤 조자양의 지도아래 중국은 연평균 8%의 GDP 성장을 계속 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기록했다. 천안문 사태를 불러 일으켰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개혁 절차가 제도화 되고 농민혁명가에서 교육을 잘 받은 전문기술인으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서 정치 제도는 안정되었다. 사회문제도 중국본토가 매년 빠르게 근대화되고 번역하게 됨에 따라 개선이 되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은 몇 가지의 남겨진 과제를 가지고 있다. 시장개혁의 결과로 1990년대 중반에는 중앙정부소유의 국영기업들이 부실화되었고, 그들이 이윤을 내지 못하고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들은 정리될 필요가 있다.

 

마침내, 공산당의 지배를 유지하면서도 마오쩌뚱의 공산주의적 가치보다 실용주의가 더 낫다는 것을 확증시키는 덩샤오핑 주의는 서양에 많은 질문들을 생겨나게 했다. 중국과 그 밖의 여러 관찰자들은 더 역동적이고 풍성해지는 중국 사회를 하나의 당이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모택동과 등소평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업적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을 배후에서 지휘 하였습니다. 이때 홍(紅)이란 사상적 정신을 의미했고 전(專)은 기술을 의미 했습니다. 즉 홍과 전은 이율배반적 요소를 갖고 있듯이 모택동은 홍이란 사상무장을 강화 시켰고 등소평은 전을 도입하여 중국 인민의 근대화를 이루도록 노력한바 가 있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현대화와 근대화를 누구 못지않게 강조 하였지만 이런 사상적 오류를 둘 다 갖고 있었습니다. 홍과 전이 대분 되듯이 등과 모의 큰 차이점은 이런 유의 것입니다.

 

공통점은

공산당 이론가 얻고 실천자 이었으며 혁명과 장정을 주도한 점 둘 다 미국의 화친교역을 주장한 점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을 과감하게 받아드리는 정책을 별점 (뉴욕타임즈 기자와 인터뷰에 미국에 제일가고 싶고 자유의 여신상이 제일보고 싶고 루스벨트대통령을 존경하고 존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을 신봉하는 정치가로 인터뷰한 기사가 있음)

 

차이점은

모택동은 제왕적 군림과 전체주의적 사상과 완벽한 공산주의 노선 이였고

등소평은 제왕적 군림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실용주의를 현실정치에 과감하게 도입했고 (黑猫白猫論) 후계인선에 공개적 민주적 방법을 채택한 점

 

업적은

모택동은 중국천하를 진시황제이후 유일하게 통일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외세로부터 극복하여 건국했다는 점 등소평은 중국 근대화를 통해 현재 발전된 중국의 토대를 만든 점입니다

 

<출처 : 네이버 지식인 인용>

 

제2장. 북한 공산주의 특징.

 

1. 북한의 독특한 독재 공산주의 특징.

 

1]. 북한의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

스탈린식 독재 하에서는 그래도 공산당이라는 집단 내부에서나 계급 내부에서는 동지적 평등관계가 상당히 살아있었으나 수령절대주의 하에서는 집단 내부에서도 수령의 유일사상, 유일적 명령체계가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북한 독재체제는 마르크스주의의 계급독재와도 다르고 스탈린식 독재와도 다르지만 뿌리가 계급독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 통치자들은 북한이 노동자 농민의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노동자 농민이 국가의 주인이 아닙니다. 국가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수령이고 수령의 독재체제를 움직이는 데 참가하는 수령의 심부름꾼들이 특권층입니다.

 

스탈린식 독재를 계승하고 있던 김일성의 독재와 김정일의 수령절대주의 독재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일성의 스탈린식 독재는 점차 김정일의 수령절대주의 독재로 변화되었습니다. 1974년에는 마침내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이라는 ‘당의 최고 헌장’에 기초하여 김정일의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가 합법적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종래의 사회주의 독재의 그 어떤 기존 규범에도 구애됨이 없이 오직 김정일 개인의 욕망과 의지에 따르는 수령절대주의 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김정일은 그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고 국가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 결과 정부의 행정관리 기능은 혼란에 빠지고 전면적인 경제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무더기로 굶어죽게 되고 온 나라가 문자 그대로 생지옥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처참하기 그지없는 사태가 도처에서 벌어졌지만 김정일 정권을 반대하는 소동이 일어났다는 소문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주민들은 그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을 자연재해나 전염병과 같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김정일 독재가 북한 주민들의 정신을 완전히 마비시킬 정도로 철저하였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황장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저서 인용>

 

공산주의 란?

혁명투쟁'을 수행하는 세뇌파의 선동정치 이며,

 

북한의 공산주의는

독재정권을 위한 특별한 전략 전술의 행동 법칙의 공산주의 이다.

 

공산당 이란?

혁명투쟁'을 수행하는 심장이다.

심장은 일분일초도 멈출 수 없는 독재정권을 위한 기관이며

공산주의 독재정권이 존재하는 한 '혁명투쟁'은 잠시도 멈출 수 없는 기관이다!

 

북한의 인민들은

19세기 왕조시대와 같은 무서운 선동정치로 세뇌된 정신세계에 살고 있다.

독재정권을 계승하기위하여, 개방조차 할 수 없는 폐쇄된 문명 속에 살고 있다.

 

북한 독재정권은

60년간 '전쟁준비' 에만 몰두한 세뇌된 무서운 존재임을 명심해야한다!

 

그들은 정전 후에도

김신조, 아웅 산, 동서해안 사태를 비롯하여 수많은 도발을 계속하였으며,

전방에 땅굴을 파놓고 침투 공격 할여고 하였던 무서운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는 '핵'으로 무장하고, 사이버로 이념전쟁을 부추기고 있다!

 

무방비 상태인 사이버의 개방을 이용하여, 서민층과 과거를 알지 못한 청, 장년층을 대상으로, 기존의 경륜 층[보수]와의 갈등을 선동, 이간, 내부교란, 을 수행하는 전쟁을 진행하고 있다.

 

민족, 자주라는 미명하에 월남 식 통일을 노리고 있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형편없이 열세였던 월맹이 민족주의를 앞세워 월남을 패망시킨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의 확실한 변화가 오기 전에는 저들의 감언이설이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되며, 확실한 검증 없이 신뢰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더 발전 했다고 지나치게 자만, 과신하고 방심하면 발전도 한낮 모래성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은 국경이 따로 없는 무한 경쟁 시대이며 탈이념 시대” 임을 북한은 망각하고 있다. 미군철수, 보안법의 수정이나 폐지는 시기상조'임을 강조한다!

 

2. 공산주의 와 민주주의 우월성의 근본.

 

공산주의 : 인간의 타고난 본능을 무시한 공산주의 경제체제로는

생산성, 효율성, 물류성의 저하 때문에 공산주의 종주국인 구소련도 망한 것입니다.

 

'자주'가 '자유'를 압도하려는 감상적인 통일논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자유가 없는 자주는 허구일 뿐입니다. 자주와 자유는 함께 추구되어야 합니다.

 

자유로운 시민의 참여가 보장된 자주만이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민주주의 시장경제 :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자유'와 '인권'과 '소유'가 무한 보장되어, 개인의 능동적인 욕구가 충만 할 때만이 인간은 초능력을 발휘 할 수 있으며, 무한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3. 잘못된 세습 독재정권을 우리가 도와야만 하나.

 

북한은 누구를 위한 정권인가?

북한은 300만 명이나 굶어 죽으면서 개혁 개방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직계 간에 생이별이다! 그들의 슬픔을 아는가?

부모형제 처자식도 60년 동안이나 못 만나게 한 것이, 우리민족 끼리인가!

무력으로 핵'으로 무장하고 적화통일 하자는 것이, 우리민족 끼리인가!!

 

북한의 민주화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인권탄압, 빈곤퇴치, 평화정착에 과감한 목소리를 내는 나라와 사람들이 있어야 가능하다.

동질성이 회복되지 않는 통일은! 민족의 비극만을 자초 할 뿐이다.

개혁, 개방, 민주화, 시장경제가 정착되고 문화 경재 협력으로, 동질성 회복이, 통일의 지름길이다!

 

4. 북한의 핵‘ 보유로 북한 체제보장 가능여부.

 

구소련은 경제적인 체제의 실패로 몰락했고, 북한도 구소련을 답습하고 있다.

구소련, 동독도 스스로의 체제 모순으로 붕괴 되었었다.

구소련은 세계를 파귀 할 만한 핵'을 보유하고도 체제 모순으로 망했다.

인간 본능을 무시한 체제의 붕괴는 가공할 무기로는 막을 수 없다.

 

체제보장을 위한 북한의 핵‘ 전략은 성공 할 수 없을 것이다.

핵' 개발로 북한은 더욱 고립될 것이고, 붕괴가 가속화 될 것이다.

북한의 핵‘ 문제는, 남북 간에 경제협력 민족공조를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국제적인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진정한 민족공조는, 7천만 한민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는 길이다!!

 

북한의 민족공조란, 한미동맹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며, 민족주의를 앞세워 월남 식 통일을 바리는 것이다.

 

제3장. 남‘북 이질화된 현상.

 

1. 상상을 초월한 독재정권의 우상화 현실.

 

1]. 북 김정일 현수막 철거.

경북 예천에서 열린 대구 유니버시아드 경기대회 양궁경기 응원 후 숙소로 돌아가던 북측 응원단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이 담긴 환영 플래카드가 아무 곳에나 방치 되어 있다며 현수막을 철거해가고 있다.

 

                        

 

北, 룡천역서 대규모 폭발사고로 3000여명의 사상자가 예측된다..비상상태

2004/04/22

22일 오후 1시께 북한 신의주에서 평양 쪽으로 50km 떨어진 평안북도 용천군 룡천역에서 석유와 LP 가스를 실은 화물열차가 서로 충돌하면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나 엄청난 수의 인명 피해가 났다고 중국 국경 도시 단둥(丹東)의 중국 소식통들이 전했다.

 

이날 사고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 방문을 마치고 특별 열차편으로 이 역을 통과한지 약 8~9시간 만에 발생,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소식통들은 이 사고로 룡천역 주변이 마치 폭격을 당한 것처럼 폐허로 변했으며 폭발에 따른 파편이 하늘로 높이 치솟으면서 기류를 타고 신의주 일대까지 퍼졌다고 전했다.

 

이 같은 사고 규모로 미뤄 엄청난 수의 인명 피해가 난 것은 확실시 되고 있으나 사고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인명 피해 규모를 도저히 확인할 수 없다고 전한 것으로 소식통은 말했다. 일각에서는 사망자가 수 천 명에 달한다는 설까지 나오고 있으나 현 단계로선 추정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은 사고현장 일대에 일종의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폭발 사고 소식이 외부로 더 이상 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제전화선을 끊어 현재로선 외부 통화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또 용천군에 있는 가스 저장소에서 폭발 사고가 났다는 설이 나도는 등 룡천역 대폭발 사고에 대한 소문이 단둥 일대에 파다하게 번지고 있다. 그러나 사고가 난 룡천역 부근에는 가스 저장소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사고는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 방문을 마치고 특별 열차편으로 이 역을 통과한지 약 8~9시간 만에 발생한데다 룡천군에는 김 위원장이 자주 방문했던 용천 종합기계공장이 있어 테러기도 관련 여부에 신경을 기울이는 시각도 있다.

 

마주 오던 화물차가 충돌하게 된 경위와 구체적인 인명 피해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LP 가스나 석유는 중국 측이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 선물로 준 것이라는 설도 퍼지고 있다.

 

단둥에 이번 폭발 사고 소식이 파다하게 번지자 중국인들은 사고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친지들의 안부를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사고가 난 용천은 중국과 국경을 접한 지역으로, 육상 및 수상 교통의 요충지이다.

 

                 

 

:: 북한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아직도 지구촌에는 이런 사회가 존재하고 있을까? 남북간에 동질성 회복이란 먼 훗날 [다음세대] 에나 생각 해 볼 일이다!!!

 

다음은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내용이다. (룡천 4월 27일발 조선중앙통신)

 

2]. 용천에 수령 결사 옹위의 숭고한 화폭.

 

조선인민의 수령 결사옹위 정신은 말로써가 아니라 실천행동에서 더욱 뚜렷이 발휘되고 있다. 얼마 전 평안북도 용천에서 뜻하지 않은 폭발사고(4.22)가 발생하였을 때였다.군 일반용품 수매상점 수매 원들인 최영일과 전동식은 점심 식사하러 가던 중 알지 못할 강한 폭음소리를 듣고 기업소로 달려가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초상화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초상화를 품에 안고 나오다가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영웅적으로 희생되었다.

 

수업도중 강력한 폭풍으로 용천소학교 건물이 파괴되면서 교실에 불이 달리자 32살 난 한은숙 교원은 3층 교실에 모신 김일성주석의 초상화와 김정일 동지의 초상화를 안전한곳으로 모신 다음 7명의 학생들을 구원하고 희생 되였으며 56살의 한정숙 교원도 초상화를 품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용천 교장 최병렵은 사고현장으로 달려온 아들과 함께 오랜 시간 화염과 싸워 절세의 위인들의 혁명사상과 불멸의 업적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철저히 보존하였다.

 

군 탁아소 소장 박순미와 장연희, 리봉숙을 비롯한 7명의 보육원들은 강한 폭음과 폭풍으로 천정이 내려앉는 등 탁아소건물이 심히 파괴된 속에서도 수십 상의 초상화를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최대의 충정을 기울 이였다.이밖에도 용천중학교 교장 강영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영상작품들을 한점의 티도 없이 보존하였으며 주민들은 가족의 생사여부와 가장집물들을 찾기에 앞서 가정에 모신 초상화들을 안전하게 모시였다.

 

뜻하지 않은 피해 속에서도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신 김일성동지를 영원한 주석으로 높이 모시고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끝없이 신뢰하고 따르는 조선인민의 고결한 사상정신 세계가 이 수령결사 옹위의 숭고한 화폭을 펼치였다.(끝) 조선중앙통신 기사내용 [2004년 4월 30일 기사 목록]

 

북한의 인민들은 19세기 왕조시대와 같은 무서운 선동정치로 세뇌된 정신세계에서 살고 있다.

북한은 60년간 '전쟁준비' 에만 몰두한 세뇌된 무서운 존재임을 명심해야한다.

"지금은 국경이 따로 없는 무한 경쟁시대이며 탈이념 시대” 임을 북한은 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의 확실한 변화가 오기 전에는 저들의 감언이설이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되며  신뢰해서도 안 된다. 미군철수, 보안법의 수정이나 폐지는 시기상조임을 강조 또 강조한다!

 

3]. “北 미녀응원단 수용소 끌려갔다”

 

“南서 보고 들은 것 발설” 탈북자들 잇달아증언. 남북한이 함께 출전한 국제 체육행사 때 남한을 방문했던 북한의 미녀응원단<사진> 일부가 수용소에 수감된 것으로 16일 알려졌다.

 

함경남도 단천시 검덕지구의 대흥수용소에서 풀려나 최근 중국으로 탈북한 이명호(가명)씨는 “작년 11월쯤 수용소에 21명의 젊은 여자들이 수감됐다”면서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남한에 응원단으로 다녀온 사람들 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현지에서 들은 얘기로는 이들이 남조선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일절 발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어겼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넘었다는 다른 탈북자는 “미녀응원단은 출신성분이 좋은 대학생이나 선전대, 음악대학 학생들로 구성됐다”면서 “이들은 남한으로 떠나기 전에 국가안전보위부에 서약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용은 ‘적지(남조선을 적들의 지역이라고 부름)에 가면 장군님의 전사답게 싸운다.

‘돌아와서는 남조선에서 보고들은 것을 일절 발설하지 않겠다. ‘이를 어기면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 는 것이라고 한다.

 

대흥수용소는 경제범들을 수감하는 곳이다.

북한은 2002년 9월 부산아시아경기대회(270명)를 시작으로 2003년 8월 대구유니버시아드(306명), 2005년 9월 인천아시아 육상 선수권대회(124명) 등에 미녀응원단을 파견했었다.

 

입력 : 2006.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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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Ⅳ부. 공산주의 특징.[차례]

 

제1장 공산주의 몰락.

 

1. 공산주의.

 1]. 공산주의 유래.

 

2. 소련의 공산주의 종주국 패망.

 1]. 공산주의를 혁파한 고르바초프.

 

3. 동‘서독 통일 과정.

 1]. 동독의 패망.

 2]. 동독정권의 패망 일정.

 

4. 중국 개혁 개방과 시장경제.

 1]. 중국 현대화의 주역 등소평[덩샤오핑]

 

제2장. 북한 공산주의 특징.

1. 북한의 독특한 독재 공산주의 특징.

 1]. 북한의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

 

2. 공산주의 와 민주주의 우월성의 근본.

3. 잘못된 세습 독재정권을 도와야만 하나.

4. 북한의 핵‘ 보유로 체제보장 가능여부.

 

제3장. 남‘북 이질화된 현상.

1. 상상을 초월한 독재정권의 우상화 현실.

 1]. 북 김정일 현수막 철거.

 2]. 용천에 수령 결사 옹위의 숭고한 화폭.

 3]. “北 미녀응원단 수용소 끌려갔다” .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