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Ⅲ부. 휴전협정 후 북한의 테러사건.

 

 북한 테러의 유형

북한의 대남 테러는 1950년대 말 대한항공기 납치 사건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2000년 서해(西海) 연평해전에 이르기까지 국가원수 암살 테러를 비롯하여 지상·해상·공중·해외에서 모두 4백70여건에 걸쳐 3,738명에 이르는 주요 인사와 민간인 납치, 그리고 국가주요시설 파괴 등 다양한 형태의 테러를 자행하여 전쟁에 버금가는 위기상황을 조성하여 왔다.

 

북한이 이러한 테러를 자행한 근본적인 목적은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 불기 시작한 경제 개발 계획과 자주국방태세 확립, 그리고 한미연합공동방위는 북한의 무력적화통일에 최악의 상황으로 작용하였고, 북한은 이의 돌파구 마련책으로 한국의 국가원수 암살과 주요시설 파괴 등 테러 활동을 통해 한국을 혼란에 빠트려 한반도에서의 위기상황과 주한미군 철수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획책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북한은 6·25와 같은 전쟁에 의한 무력적화 통일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폭력혁명의 일환으로 무자비한 테러 및 파괴활동으로 남한 사회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북한이 의도하는 궁극적 무력통일을 달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정전 이후 북한의 각종 테러 유형과 특징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우리의 대비태세를 살펴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국가원수 암살 테러, 항공기 테러, 해상 테러, 주요인사 납치 테러, 국가주요시설 파괴 테러, 무장공비 침투 테러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제1장. 국가원수 암살 테러.

 

1960년대 후반 북한은 남한이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국력이 신장되고, 또 모든 대남공작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가원수 암살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청와대 기습 암살테러,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8·15 광복절 대통령 저격사건, 아웅산 국립묘지 폭파사건, 그리고 해외 순방중인 대통령 암살 사건 등이 있다.

 

북한이 이러한 테러 수법을 사용한 것은 대한민국 수반인 대통령을 암살 및 저격함으로써 일시에 남한 정부 및 사회를 극도의 혼란에 빠뜨려 그들의 목적을 손쉽게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대통령 암살 저격 테러 사건 중 가장 중요한 청와대 기습 테러, 국립현충문 폭파 사건, 8·15광복절 대통령 저격사건, 그리고 아웅산 국립묘지 폭파사건 등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1. 1·21 청와대 기습.

 

1968년 1월 21일 북한 제124군부대 특수요원에 의해 자행된 청와대습격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함으로써 남한을 혼란에 빠뜨려 적화통일의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 하에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군 31명이 1968년 1월 17일 밤에 비무장지대로 침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68년 1월 21일 밤 10시경 북한군 제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침투하여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습격하려다가,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 검문에 걸리자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4대의 시내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승객들을 살상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날 밤 대간첩작전을 지휘하던 서울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비롯하여 7명의 군경과 민간인이 북한 무장공비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에 군은 즉각 제6군단장 책임 하에 군경 합동작전으로 무장공비들을 추격 및 포위작전으로 소탕작전을 펼친 끝에 2월 3일까지 31명의 공비 중 1명을 생포하였으며 도주한 2명을 제외한 28명을 사살하였다. 이들 무장공비가 침투한 목적은 김신조

1) 대통령관저 폭파와 요인 암살,

2) 주한 미 대사관 폭파와 대사관원 살해,

3) 육군본부 폭파와 고급지휘관 살해,

4) 서울교도소 폭파,

5) 서빙고 간첩수용소 폭파 후 북한간첩 대동 월북 등이었다.

 

이 사건은 생포된 김신조의 자백에 의하면 그 전모가 드러났는데, 대한민국 국가원수를 테러 대상으로 삼은 사건으로서 북한의 적화통일을 위한 폭력혁명전략의 일환으로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에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방력 강화와 250만 명의 향토예비군 창설,

방위산업공장의 설립을 서둘러 추진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사이러스

밴스 미국대통령 특사가 2월 11일 방한하여 양국 간 안전보장을 위한 공동성명이 발표되었고, 1968. 5. 27∼28간 워싱턴에서 제1차 한·미 국방장관 회의가 개최되어 연례화 하는 계기를 조성하였다.                                                 1.21 청와대 기습태러 사건 당시 체포된

                                                                                                                             김신조

그리고 한국정부는 북한의 남파 게릴라 침투에 대비하여 군내에 공비전담

특수부대를 편성했고, 전방에는 155마일 휴전선에 철책을 구축하였다. 또한 정부정책기조를 경제개발과 동시에 자주국방을 기틀을 강화하는 국방정책을 추진하였다.

 

2. 국립현충문 폭파테러.

 

국립묘지현충문 폭파사건은 한국전쟁 20돌을 앞둔 1970년 6월 22일 03:50경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현충원에 수 미상의 무장공비가 잠입, 현충문에 폭약을 장치하려다 실패하여 폭약이 폭발하면서 북한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위한 테러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이들 공비들은 한국전쟁 20주년 행사시 요인암살을 주목적으로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으며, 사용된 폭발물은 반경 30미터 안에 있는 인마(人馬)를 살상할 수 있는 고성능 폭약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간첩대책본부는 이들 무장공비들이 오는 한국전쟁 20주년 행사를 기해 국립현충원을 참배하는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하여 고성능 폭발물을 현충문에 장치, 전파나 유선을 통해 폭파시키려 했다고 발표하였다.

 

군·경·예비군 합동수색대는 22일에 국립현충원에 침투했던 무장공비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경기도 일원에서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는데, 동년 7월 5일 오후에 김포지역에서 무장괴한 2명을 보았다는 모 초등학교 어린이의 신고를 받고 수색망을 좁혔으며, 공수특전단원들이 김포 서쪽 10킬로미터 지점의 산에서 이들을 포착하여 교전 끝에 사살하였다.

 

이날 교전에서 아군은 기관단총 1정, 권총 1정, 대검 1개, 미화 150달러, 한화 51만원, 라디오 1대 등을 노획했다. 이러한 북한의 대남공작은 북한이 본격적으로 남한 사회 불안 조성을 위하여 대통령을 비롯한 요인암살에 주력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3. 8·15 광복절 대통령 저격 테러.

 

1974년 8·15 광복절 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저격미수사건은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되는 8·15 경축식전에 귀빈을 가장하고 잠입한 재일 교포 문세광이 광복절 경축사를 낭독중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권총으로 저격하려다가 실패하고 붙잡힌 북한의 대표적인 테러 저격 사건이었다.

 

경축식장 1층 뒤쪽의 해외 교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저격범인 문세광은 10:20경에 좌석에서 갑자기 일어나 박대통령을 향해 저격했는데 1탄은 불발이었고, 2탄은 박대통령이 사용 중이던 연설대 우측에 맞았으며, 3탄이 단상에 앉아 있던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두부에 맞았는데, 육 여사는 경호원들과 여자 합창단원의 부축을 받고 서울대학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 박대통령은 저격범이 체포된 뒤에 태연히 경축사를 계속 낭독하였으며, 경축식전은 예정대로 끝났다.

 

그러나 불과 22초라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는 5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으나 오후 19:00에 49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그리고 합창단원의 한 사람인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학생인 장보화 양이 경호원이 쏜 총탄에 희생되었다.

 

8·15 저격사건은 범인 문세광이 재일 교포이고 그가 범행에 사용한 권총이 일본 경찰에서 훔친 것이며, 그가 입국에 사용한 여권이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이라는 점에서 한일 관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박대통령 저격사건 수사본부는 17일 밤 저격범 문세광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박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고 발표하였다. 김일두 수사본부장은 문세광이 김일성의 지령에 의해 북한과 일본을 왕래하는 북한 선박 만경봉호에 승선하고 있는 성명 미상의 북한 공작지도원과 조총련 오오사까부 생야구 서지부 김호룡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왔음을 자백했다고 밝혔다.

 

이어 김 본부장은 범인 문세광이 이들로부터 거사 자금조로 2차례에 걸쳐 130만 엔을 받았으며, 당초에는 1974년 3월 1일 경축식전에서 범행을 하려하다가 총기 구입이 여의치 않아 8월 15일로 연기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범인 문세광은 1972년 9월 5일경부터 대한민국에 있어서의 공산혁명 완수를 위한 지도 교양을 받아 오던 중 1973년 11월 초순 김호룡 으로부터 1974년 3월 1일의 기념행사 때 박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았으며, 무기 구입 차 홍콩을 여행하였으나, 무기 구입이 여의치 않아 3,1절 행사시 거사는 착수조차 하지 못했다.

 

문세광은 1974년 5월 5일 오오사카 항에 정박 중이던 만경봉호에서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재차 받았다. 범인 문세광은 1974년 7월 18일 오오사카부 남구경찰서 고진 파출소에 침입하여 권총 2정을 절취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974년 7월 24일 문세광은 김호룡 으로부터 거사 자금조로 일화 80만 엔을 받음과 동시에 여권 발급 등 거사 방법 등에 관한 지시를 받았다.

 

수사결과 대통령 저격사건이 문세광의 자백으로 조총련의 지령 하에 이루어진 사실이 밝혀졌고, 범인 문세광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74년 12월 21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문세광 에게 적용된 죄목은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목적 살인, 살인미수, 출입국 관리법 위반 등이었다.

 

저격 직후 현장

     고 육영수 여사     살인범 문세광

      저격 직후  현장                  고 육영수(49)여사.                    살인범 문세광

 

4. 아웅산 국립묘지 대통령 암살 테러.

 

아웅 산 국립묘지 암살 테러사건은 북한이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를 친선 방문 중이던 한국 전두환 대통령 및 수행원들의 아웅 산 국립묘소 참배를 이용, 암살하기 위해 사전에 이 묘소 건물 천장에 설치한 원격조종폭탄을 폭발시켜 한국의 부총리와 장관 등 수행원 17명을 순국케 하고 14명을 부상시키는 천인공노할 테러를 감행하였다.

 

미얀마 당국의 수사결과 이 사건은 북한 독재자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 국 특공대 소속 진모(某) 소좌,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 등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밝혀졌다. 미얀마 정부는 이 사건의 수사를 매듭지으면서 11월4일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양곤에 있는 북한대사관 직원들의 국외추방을 단행했다. 그 뒤 12월 9일 양곤지구 인민법원 제 8특별 재판부에서는 테러범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사건으로 코스타리카·코모로·서사모아 등 3개국이 북한과의 외교를 단절하였으며, 미국·일본 등 세계 69개국이 대북한 규탄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11월 13일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 최전방을 이례적으로 시찰하는 등 한·미 공동 자유 수호 결의를 재확인하였다.

 

아우산 태러 현장

                    아웅산 태러범 강민철

           ↑20년만에 다시 찾은 아웅산 테러 현장.                                          ↑아웅산테러 북한 공작원중 유일한 생존주범 강 민철

 

제2장. 항공기 테러.

 

북한에 의한 항공기 테러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크게 변하고 있다. 1980년대 이전에는 단순한 항공기 납치 등 항공기를 이용한 테러이었으나, 1980년대부터는 그 수법이 항공기 폭파라는 반인류적·반문명적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그 목적도 인질 납치 및 항공기 억류에서 대량 인명 살상 등을 통한 남한의 불안한 상황을 세계에 알려 한국을 고립시키고, 나아가 한반도의 긴장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국제행사인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이 행한 1987년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사건은 서울 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저지러진 대표적 사례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북한의 항공 테러의 대표적 사례인 1969년 항공기 납북과 1987년 대한항공 858기 공중폭발 테러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1969년 대한항공 YS-11기 납북 테러.

 

항공기 납북사건은 1969년 12월 11월 12:25분발 강릉 발 서울행 대한항공 소속 YS-11기가 승객 47명과 승무원 51명을 태우고 대관령 상공을 비행 중 고정간첩인 조창희에 의해 강제 납북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동 여객기가 월북한 다음날인 동년 12일 착륙지점을 밝히지 않고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 입북"이라는 간단한 보도만 하였다.

 

정부는 즉시 이러한 북괴의 공중 해적 행위를 규탄하고 기체와 승무원 및 승객 전원의 송환을 촉구하는 한편, 국제 적십자사를 비롯한 국제기구에 송환을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납북행위 자체가 군사정전협정에 위반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한 송환교섭도 아울러 벌였다. 그러나 우리의 성의 있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기체와 51명의 탑승객을 감금해 놓고 미리 조작한 각본대로 대응하였다.

 

12월 20일 북한은 조종사의 기자회견을 보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종사 유병하와 부조종사 최석만은 12월 11일 우연하게도 같은 조로 편성되어 강릉을 갔다 오게 되었으며, 이들은 군대에 있을 때부터 이심전심으로 서로 뜻이 통했기 때문에 자신 월북을 결행하였다. 그리고 북한 기자들의 질문도 한결같이 월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질문이었고, 두 조종사는 각본대로 북한 현실의 찬양과 한국 실정의 왜곡선전으로 시종일관(始終一貫)하였다.

 

1969년 12월 25일 북한 중앙통신사는 성명을 발표하여 인질외교의 본색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성명에서 조종사에 의한 의거 입북을 기정사실화하고 국제적십자사 제3자의 개입 없이 그들이 지정한 민간대표들과 직접 소환교섭을 벌이자고 정치적 흥정을 교섭하였다.

 

그 후 북한은 1970년 2월 5일 납북승객을 송환하겠다고 국제적십자에 송환 통보를 하고 지정한 날짜가 지나도록 송환하지 않았다. 1970년 2월 14일 17:00 탑승자 51명 가운데 39명이 판문점을 통해 납북 65일 만에 다시 자유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날 39명의 귀환승객들은 20:00가 넘어 서울에 도착 15일 오후 기자회견을 통해 KAL기 납북경위와 북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승객들은 사건 당시 항공기가 대관령 상공에 이르렀을 때 객석 앞자리에 앉아있던 조창희가 갑자기 조종실로 들어간 직후부터 방향이 바뀌는 것을 느꼈고, 동해 상공에 이르렀을 때 2대의 북한 전투기가 KAL기를 호위한 것을 보고 나서 납북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북한은 민간항공기의 범죄적 납북을 은폐하기 위해 두 조종사에 의한 의거 입북을 주장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인원을 억류함으로써 진상이 폭로되지 않도록 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 테러.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이 행한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 테러사건이다.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 테러사건은 1987년 11월 28일 밤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한 대한항공 858기가 아랍 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 기착한 뒤 방콕으로 향발하는 도중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사전 장치한 폭탄에 의해 공중 폭파된 사건이었다. 이 여객기는

 

1988년 11월 29일 14시 1분 미얀마의 벵골 만 상공에서 방콕공항에 "45분 후 방콕에 도착하겠다. 비행 중 이상 없다"는 보고를 무선으로 보낸 것을 끝으로 소식이 끊어졌다. 이 여객기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한국인 근로자 등 승객 93명과 외국인 2명, 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여객기 잔해가 태국 해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태국 내무부가 발표하였고, 30일 오후 858기의 추락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12월 1일 사고 비행기에 한국입국이 금지된 "요주의 인물"인 일본인 2명이 탑승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급진전되었다. 문제의 두 일본인은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여권을 가진 남녀로 바그다드에서 탑승한 뒤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으며, 이중 마유미의 여권은 위조여권임이 바레인(탈출로 중간 기착지)공항에서 밝혀졌다. 이들은 바레인에서 요르단으로 탈출하려다 위조여권 적발로 체포되자 담배 속에 숨겨둔 독극물을 삼켜 자살을 시도하여 남자는 숨지고 여자는 중태에 빠졌다.

 

한국으로 신병이 넘겨진 '마유미'여인은 중국어와 일본어를 사용하며 중국인 행세를 해오다가 12월 23일 범행을 자백했는데 본명이 김현희이며 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으로서 음독자살한 김승일과 함께 "88 서울올림픽 개최 방해를 위해 KAL기를 폭파하라"는 북한 김정일의 친필 공작명령을 받고 기내 좌석선반에 라디오와 술병으로 위장한 폭발물을 놓고 내려 공중에서 폭발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 후 김현희는 1990년 3월 27일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전향의사 표명과 김정일의 도구로써 이용된 점이 정상 참작되어 1990년 4월 12일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변장한 김현희         김현희            858 비행기 잔해

           증거 유혹                                            김현희                                            858기 잔해

 

제3장. 해상 테러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는 공격자에게 매우 유리한 지형인 반면, 이를 지키는 방위 자에게는 반대로 매우 불리한 지형이다. 북한은 정전 협정 이후 수 없이 많은 해상 도발 및 테러행위를 감행해 왔다.

 

북한의 해상을 통한 테러행위는 어선의 납북과 공작선 침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한국 해군함정을 공격하는가 하면 미 해군 정보함‘을 납치하여 승무원을 장기간 억류하는 등 각종 도발 및 테러행위를 자행해 왔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북한이 자행한 해상 테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인 해군 함정 및 경비정 피침사건과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그리고 1999년 서해 NLL 침범사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해군 제56함 공격 테러.

 

해군 제56함 피침사건은 1967년 1월 19일 오후 동해 휴전선 근해에서 명태 잡이 어선을 보호하던 해군 제56함 당포호(650노트, 승무원 79명)가 북한군 육상 포대로부터 약 20여 분에 걸쳐 200여발의 집중 포격을 받고 침몰된 사건이다.

해군 당국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이 교전에서 제56함 승무원 79명 중 39명(장교 2명, 사병 37명)이 전사하고, 14명이 중상, 16명이 경상을 입었으며 무사한 장병은 10명뿐이었다.

 

1967년 1월 19일 13:30경 북한의 수원단 동쪽 6마일 해상에 나타난 북한 해군 함정 2척이 고기떼를 따라 해상휴전선 근처에서 어로작업 중이던 민간 어선 약 70여 척을 납북하려고 하였다.

 

해군 제56함은 이를 발견하고 우리 어선들을 안전하게 대피하고자 북한 해안과 가까운 38도선 해역에 접근하자, 북한의 해안 동굴진지에 위치한 해안 포대에서 13:50부터 20분간 약 200여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이에 해군 제56함도 응전하였고, 급히 달려온 해군 제53함도 3인치 함포로 응사하였으나, 해군 제56함은 적의 포탄에 명중되어 동일 14:34에 동해 해상에서 침몰하였다.

 

2. 해경 제863호 경비정 공격 테러.

 

해경 제863호 경비정 피격사건은 1974년 6월 해군 경비정이 북한 해군 함정에 의해 격침된 사건이다. 국방부는 1974년 6월 28일 10:30경 동해의 해상군사분계선 남쪽인 거진 동쪽 25마일 해상에서 어로(漁撈) 보호 경비 중이던 해경 경비정 200톤급 제863호가 북한 해군 함정 3척에 의해 포위되어 교전중이라는 보고가 있은 뒤 통신이 끊겼는데, 제863호 경비정은 북한 해군 함정의 포격으로 격침되었음이 분명하다고 발표하였다.

 

발표에 의하면 제863호는 6월 28일 08:10경 어선들을 경비중 북한 경비정 3척에 포위되었다고 보고하였는데, 국방부는 사건발생 보고를 받자 즉각 해군 함정과 공군기를 출동시키고 해경 경비정을 현장에 급파하였으나 사고현장의 구름이 낮고 심한 안개와 높은 파도 때문에 구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하였다.

 

제863호 경비정은 속초기지 소속으로 건조된 지 얼마 안 되는 시속 20노트의 초계정인데 6월 28일에 28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거진 근처의 어로저지선 근방에서 어선단을 경비중 "북한 함정으로부터 피격되었다.

 

북한 함정이 우리 배를 포위했다"고 타전해 왔고, 그 후 다시 '교전중' 이라고만 보고하고 교신이 끊겨 버렸다. 사고해상은 이날 아침 심한 안개가 끼어 있어서 북한 함정이 해상 군사분계선을 지나 월남하여 어선들을 납치하려다가 경비정을 공격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북한은 6월 28일 오전 해상군사분계선 부근에서 한국 경비정 한 척을 침몰시키고 수명의 승무원을 사로잡았다고 동경에서 청취된 북한 중앙통신을 통하여 보도했으나, 몇 명의 승무원이 포로가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에 유엔한국대표부는 6월 28일 오전 북한이 동해 공해상에서 초계정 제863호를 격침한데 대하여 "즉시 이 만행을 사과하고 초계정의 생존자와 사망자 유해를 송환하라"는 내용의 강경입장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3. 미 정보함 푸에블로함 납치 테러.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은 미 존슨 행정부 시절이던 1968년 미 해군 소속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 앞 바다에서 북한 해군에 나포되는 과정에서 미군 해군 1명이 사망하고 82명의 군인들이 무려 11개월이나 붙잡혀 있다 가까스로 승무원들만 풀려난 사건이다.

 

푸에블로호는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 앞 공해상에서 정보수집활동을 하던 중 북한 해군 함정에 의해 나포됐으며, 그 과정에서 북한 해군의 발포로 승무원 1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했다.

 

미 해군 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되기는 미 해군사상 10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푸에블로호는 1월 23일 정오경 1척의 북한 초계정으로부터 첫 공격을 받았으며 14:32에는 "엔진이 모두 꺼졌으며 무전연락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원산항으로 끌려간다"고 최종보고를 보내 왔다.

 

이에 대하여 국무성은 푸에블로호와 승무원들을 즉각 석방하도록 소련을 통해 북한과 접촉하고 있다고 하였다.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조한 해군 정보수집 보조함으로서 무게 906톤, 길이 54m, 폭 10m, 속도 12.2노트이고, 승선인원은 장교 6명, 사병 75명, 민간인 2명 총 83명이었다.

 

푸에블로호는 1월 23일 낮 정오경 1척의 북한의 초계정으로부터 무전으로 "국적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미국 소속"이라고 답변했다. 이에 북한 함정은 "정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 왔고, 푸에블로호는 "공해상에 있다"는 답전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약 1시간 후 북한 함정의 지원을 받고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도착하여 포위하였다. 북한 미그기들이 푸에블로호의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한 초계정이 접근하였으며 무장군인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하였다. 이때가 13:40분이었다. 푸에블로호는 "무력저항을 하지 않았다"면서 원산항으로 끌려간다고 보고한 뒤 14:32에 "무전을 끊는다"는 마지막 무전보고를 보냈다.

 

한편 이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일본에서 베트남으로 항해중인 핵(核)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3척의 구축함을 진로를 변경시켜 원산만 부근에서 대기토록 하였으며, 25일에는 해·공군의 예비역 14,000여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 372대에 대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했으며,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를 급파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취해 나갔다.

 

28일에는 추가로 2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및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킴으로써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30여차례의 비밀회담 끝에 납치된 승무원들이 325일 만인 1968년 12월 23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당시 미국은 반전(反戰) 여론 때문에 월남전에서 철수를 고려하고 있는 시기여서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상태를 원치 않았으므로 상당한 양보를 하면서 협상에 임했던 것이다. 한편 푸에블로호 사건이 일어난 지 31년이 지난 1999년 북한은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를 김정일 지시에 의해 1999년 10월 대동강 '충성의 다리' 근처로 옮겨 반미(反美)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난 1969년 4월 15일 발생한 EC-121 정찰기 격추 사건도 한반도에 급박한 상황을 연출했다. 승무원 31명을 태우고 일본에서 출발한 미 해군 EC-121 정찰기가 1대가 동해 북방한계선(NLL)부근에서 북한에 의해 격추돼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한반도 주변에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급파하는 등 한반도에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외에도 북한이 미국의 정찰활동에 대응한 사건으로는 지난 1981년 8월 26일 미 공군 정찰기 SR-71 1대가 `한국과 공해 상공'을 비행하던 중에 북한군으로부터 미사일 공격을 받았던 사건도 있다. 이밖에 지난 1994년 12월 17일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미군 정찰헬리콥터 OH-58C를 북한 측 강원도 금강군 이포리 상공에서 격추시킨 사건도 북·미간 정찰관련 군사적 마찰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 사건 발생 직후 미 하원 빌 리처드슨 의원이 북한을 방문, 북측과 협상을 타결함으로써 사건 발생 13일 만인 12월 30일 헬기조종사 보비홀 준위와 함께 격추 당할 당시 사망한 하일먼 준위 유해가 송환됐다. 북한은 최근에도 매월 초에 미군의 지난달 공중정찰 횟수를 방송을 통해 보도하는 등 미국의 정찰활동에 신경 쓰고 있다. 이는 북한이 미·북간에 이 같은 사건들이 되풀이될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4. NLL 침범 해상 테러.

 

1999년 서해 북방한계선(NLL) 침범사건은 북한 경비정 6척이 동년 6월 7일 꽃게잡이 어선을 앞세우고 연평도 서방 10㎞ 지점에서 북방한계선을 넘어 우리 영해를 침범해 들어와 한국 해군의 경고를 무시하고 침입과 퇴각을 반복하면서 9일 동안이나 버티다가 이를 '충돌식 밀어내기' 전술로 저지하는 한국함정에 북한경비정이 선제사격을 가함으로써 결국 남북 함정간의 치열한 포격전으로 발전한 사건이다.

 

이 교전에서 북한해군은 어뢰정 1척이 침몰하고 경비정 4척이 대파되었으며 북한군 20∼30여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은 반면에 한국해군은 경비정 몇 척이 일부 파손되고 해군 7명이 부상당하는 비교적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이 충돌로 망신을 당한 북한해군이 북쪽으로 퇴각하여 추가도발을 해오지 않음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이번 북한의 북방한계선 무단침범은 '정전협정'의 정신과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한 구역을 인정'키로 한 '남북기본합의서'(1992년)의 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한 범법 행위였다.

 

북한이 이 사건을 일으킨 목적은 대북 포용정책하의 한국정부의 국방의지 시험, 북방한계선을 무시함으로써 정전협정체제 무력화, 향후 남북협상에서 실익을 취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 선점, 유고 패전에 따른 위축된 북한내부 결속을 위한 긴장 조성용, 그리고 꽃게·새우·조기 등 고급 어종이 풍부한 서해 5도 인근 황금어장 확보 등 다목적 카드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러나 북한이 우리 해군과의 교전에서 참패를 당함으로써 '선군정치'와 '필승불패'를 선전해온 북한 무력이 허구에 불과함을 스스로 노출시켰으나, 한국 측에는 오히려 대북포용정책이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 해군의 전투력이 북한보다 한 수 위에 있음을 확인시켜준 좋은 계기가 되었다.

 

5. 서해 교전.

 

2002년 6월 29일. 서해 바다는 포성과 총성으로 달아올랐습니다.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우리의 관할해역을 침범한 북한 등산곶 경비정 684호의 기습 공격. 그리고 치열했던 31분간의 교전. 교전 당시, 우리 해군은 북한 경비정의 악의적인 기습공격으로 정장 윤영하 소령을 비롯해 전사 6명, 부상 18명이라는 피해를 입었지만, 평소 훈련한 대로 즉각 대응 사격을 실시하여 불굴의 전투의지와 투혼을 보여주었습니다.

 

▲ 해군 2함대에 전시중인 참수리 357호정

 

■ 서해교전의 경위

서해교전은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사상처음으로 4강에 진출해 터키와 3,4위전 경기가 예정되어 있던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이 우리 고속정 357호정을 향해 의도적인 선제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발생했습니다.

 

 

오전 9시 46분. 북한 경비정 2척이 남하 기동을 시작하자, 이를 포착한 우리 해군은 대북 경계 강화와 함께 초계근무 중인 고속정 편대에 조업어선 통제 및 대응태세를 철저히 유지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9시54분. 북한 경비정 684는 연평도 서쪽 7마일 해상에서 NLL(북방한계선)을 침범했고, 참수리 357, 358로 이뤄진 우리 고속정 253편대가 긴급 출동하여 대응기동과 경고방송을 하며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경비정은 남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10시25분. 북한 경비정이 근접 거리에서 차단기동을 하던 참수리 357호정을 향해 미리 조준된 85mm포를 비롯한 모든 포를 동원하여 공격하였습니다.

 

북한의 악의적 기습공격에 참수리 357호정은 정장 윤영하 소령과 4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통신실 등 중요한 지휘체계에 손상을 입었지만, 우리 장병들은 조건반사적인 전투행동과 불굴의 투혼으로 적의 도발을 응징했습니다. 곧바로 우리측 인근 고속정과 경비중인 초계함 등이 교전에 가담해 북한 경비정을 향해 대응사격을 가했습니다.

 

 

10시43분. 우리 해군의 집중포격을 받은 북한 경비정은 퇴각을 시작했고 교전결과, 북한 경비정은 외부 갑판이 대부분 파괴됐습니다. 전사상자 역시 30여명이상 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반면, 북한 경비정의 기습공격을 받은 참수리 357호정은 치료 중 숨진 박동혁 병장을 포함 하여 전사 6명, 부상 18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선제 기습공격으로 우리 측의 인명손실이 발생하였으나 우리 해군 장병들은 불굴의 투지와 정신력으로 NLL을 사수하였습니다.

 

■ 북한이 서해교전을 일으킨 목적

먼저, 지난 99년 연평해전의 참패를 보복하기 위해 도발을 미리 계획했을 가능이 있고,

 

두 번째는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로 고양된 우리의 국제적 위상과 국민들의 사기를 꺾기 위한 도발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당시 탈북자와 인권 문제 등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위신이 실추된 북한이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발을 감행했을 가능성입니다.

 

네 번째는 남북 및 북미간의 대화재개시 주도권 확보를 염두에 두고

사전 계획된 것을 실행했을 가능성과 도발을 통해 NLL 문제를

국제적으로 부각시켜 NLL의 무력화를 시도한 것 등으로 볼 수 있죠.

 

그러나 NLL(Northern Limit Line)은 지난 50년간 남북한이 해상

분계선으로그 효력과 기능을 인정하여 관리되어 왔고,

1992년 2월 19일 발효된 “남북 기본합의서”에 의거한 것으로, 북한의 도발은 남북 기본 합의서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임은 물론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입니다.

 

우리 군은 어떠한 경우에도 현재의 북방한계선을 해상경계선으로 고수할 것이며, 또 다시 북한이 NLL 무력화를 기도하며 침범할 경우, 단호하게 대응 응징할 것입니다.

 

■ 서해의 영웅들.                       (처음으로)

 

서해 교전에서 우리 해군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또한 많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투철한 군인정신과 전우애, 필승의 신념으로 무장한 장병들의 투혼이야말로 위기의 상황에서도 승리를 보장해 주고, 군의 존재 목적을 실현하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북한 경비정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다가 적의 기습공격에 숨을 거둔 정장

                                                   故 윤영하 소령.

 

                                               

                           조타장으로 교전 당시 끝까지 타기를 잡고 있었던

                                                  故 한상국 중사.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발칸포 방아쇠를 쥐고

                                   있었던 故 조천형, 故 황도현 중사.

 

                                             

                     M60 사수로 자신의 몸을 은폐하기도 힘든 갑판에서 응전사격 중

                                          산화한 故 서후원 중사. 

                                                

                                            

               의무병으로서 부상당한 전우를 위해 동분서주 하던 중 피격을 당하여

                  3개월여의 투 병생활 끝에 꽃다운 청춘을 접은 故 박동혁 병장.

 

 

교전 후 다리를 절단해야 할 만큼 심각한 부상을 당했으면서도 정장을 대신해,

부하들을 독려하며 지휘했던 이희완 중위.

 

왼쪽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간 상태에서도 한 손으로 탄창을 갈아 끼우며 대응 사격을 멈추지 않았던 권기형 상병.

위국헌신 군인본분,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투혼, 하나로 뭉쳐진 전우애가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 이들 모두는 그날의 영웅이었습니다.

 

■ 서해교전 전사자 추모행사

 

▲ 서해교전 전적비

해군은 서해교전 4주기를 맞는 올해에도 전사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식을 6월 29일(목) 오전 10시 서해교전 전적비가 있는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거행했습니다.

 

 

이날 추모식은 윤광웅 국방부장관과 남해일 해군참모총장, 전사자 유가족, 당시 참수리 357호정 승조 장병, 함대 장병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식사, 고인에 대한 경례, 추모사, 종교의식(불교), 헌화 및 분향, 조총발사 및 묵념, 폐식사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해군은 이번 추모식에 앞서 지난 5월 5일 “석가탄신일”과 2002년 서해교전 당시 음력 주기인 6월 13일에 2함대사령부 법당에서 전사자 유가족 및 참수리 357호정 승조장병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법회를 열어 전사자들의 원혼을 달래 주었으며, 이와 더불어 서해교전 전사자들을 영원한 영웅으로 기리기 위한 다양한 추모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습니다.

 

해군본부를 비롯하여 작전사령부, 교육사령부, 3함대사령부 등 6개 부대에서는 장병들의 왕래가 잦은 근무지내 건물 통로와 로비, 강당 입구 등에 서해교전 현황과 참수리 357호정 사진, 전사자 영정 등을 게시한 추모공간을 조성하여 전사자들의 감투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특히, 2함대사령부는 서해교전 당시 참수리 357호정 정장으로 NLL을 목숨 바쳐 사수한 故 윤영하 소령을 비롯한 전사자를 추모하고 그들의 위국헌신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영하’賞을 제정하고 매년 1명씩 선발 포상할 예정입니다.

 

한편, NLL 해상으로 출동하는 함정의 전 장병은 출항전 반드시 서해교전 전적비를 찾아 묵념을 하고 구호("전우가 사수한 NLL! 우리가 지킨다!")를 제창하는 등 참배 행사를 갖고 각오를 새롭게 하여 출동에 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기관, 육ㆍ공군 및 외국군, 예비역, 일반/사회단체 등 대내외 인사들의 부대 방문시에도 서해교전 전적비 참배 및 참수리 357호정을 견학케 함으로써 서해교전 전사자들에 대한 숭고한 희생정신을 일깨우고, 굳건한 안보관 확립을 제고하고 있습니다.

 

견학인원은 '05년도에 2만 2천여 명에 이어, 올해 들어 지난 5월까지 1만 4천여 명에 이르는 등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전사자 추모를 위한 전적비 견학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지금 이 순간, 잠시 동안이라도 눈을 감고 그날에 산화한 해군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의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장소가 어디든 간에 우리의 마음은 그들에게 반드시 전달 될 것입니다.

 

출처 ; '대한민국 해군 뉴스레터 40호'에서

[출처] [해군 뉴스레터 40호]잊을 수 없는 서해교전|작성자 바다사랑

 

 

6.서해 천안함 태러

 

   
 

 

천안함’ 순직한 부사관 및 병사 명단

 

2010.3 26일 오후 9시 45분쯤 서해 백령도 서남방 1.8㎞ 해상에서 우리 해군 제2함대사령부 소속 초계함 한 척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사고로 침몰했다고 군 당국이 밝혔다. 이 전투함은 1200t급 '천안함'인 것으로 확인됐으며, 오후 11시 45분 현재 선체의 70~80% 이상 침몰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군 역사상 초계함급 이상 대형 전투함이 폭발에 의해 침몰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전투함의 폭발이 배 안에서 발생한 단순 폭발사고인지, 북한군의 공격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폭발은 배 후미 쪽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군 관계자는 "정확한 원인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 여러 가능성을 놓고 분석 중"이라고 말했다. 군 당국은 일단 북한 대함미사일이나 해안포 공격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지만 전투함이 갑자기 침몰한 것으로 미뤄 북한의 잠수함이나 잠수정의 어뢰나 기뢰에 의한 공격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합참은 "초계함의 배 밑바닥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파괴가 있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해 상황 파악과 대책을 논의했다. 군 당국은 국방부와 합참을 비롯, 주요 지휘관을 비상 소집하는 한편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자리를 지킬 것을 명령했다.

이 배에는 104명의 승조원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으며, 인명피해 규모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군은 사고 현장에 주변 함정을 총출동시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27일 0시 현재 58명의 승조원이 구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사고가 발생한 곳은 백령도 서남방 1.8㎞ 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남북 전투함정간 교전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일부 백령도 주민들은 "오후 11시쯤 우리 해군 함정이 미확인 선박을 향해 약 15분쯤 포 사격을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군 소식통은 "당시 인근에 있던 초계함 속초함에서 북쪽의 미상 타깃을 76mm 함포로 엄호사격을 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서해 백령도 서남쪽 1마일 해상에서 경비 활동 중이던 우리 해군 초계함 천안함(1천200t급)이 26일 오후 9시45분께 선체 뒤쪽에 폭발음과 함께 구멍이 뚫려 침몰했다.

합동참모본부의 정보작전처장 이기식 해군준장은 27일 “우리 함정의 선저(바닥)가 원인 미상으로 파공되어 침몰했다”면서 “27일 새벽 1시 현재 함정에 탑승한 승조원 104명 중 58명이 구조됐으며 초계함과 경비정 등을 투입해 나머지 승조원 구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새벽 3시 현재 추가 구조 상황이 들어오지 않아 40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고 직후 이명박 대통령은 26일 오후 10시께 청와대에서 김태영 국방장관과 원세훈 국정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우리 군의 인명구조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무엇보다 우리 군의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전중 다시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사태 파악에 나설 예정이다.

이어 이기식 준장은 “파공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북한이 (공격)했다고 단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빠른 시간내 원인 규명을 하고 원인이 확인되면 거기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할 것이다. 원인을 규명하려면 날이 밝아야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조되지 않은 승조원들은 물에 빠졌을 수도 있으며 배는 거의 다 잠겼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천안함은 선체 뒤쪽 스크루 부분에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선체가 들리면서 구멍이 뚫려 침몰했으며 승조원 상당수가 바다로 뛰어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원인과 관련, 합참은 인명 구조작업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아직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군은 이날 해난구조대(SSU)를 투입해 수심 20~30m 아래 가라앉은 초계함의 폭발 지점을 정밀조사하고 혹시 모를 시신 수습에 나설 계획이다.

사고 당시 천안함의 인근에 있던 초계함 속초함에서는 레이더로 미상의 물체를 포착하고 5분간 경고사격을 가했다. 일각에서는 북쪽에 있던 미상의 타킷(선박)을 향해 발포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에 이 준장은 “작전 중이던 초계함의 레이더 상에 미상 물체가 포착되어 경고사격을 하였고 레이더에 포착된 형상으로 보아 새떼로 추정된다”면서 “정확한 내용은 확인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선미 쪽에 구멍이 난 것으로 미뤄 북한의 어뢰정 등에 의한 공격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합참은 확인되지 않았다면서 신중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초계함의 침몰 지점은 백령도와 대청도 사이 NLL(북방한계선)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해상이다.

현재 해군은 백령도에 구급차와 구조헬기 등을 긴급 출동시켜 구조된 승조원들의 건강을 살피고 있고 사고 해상에는 초계함과 경비정 등을 대기시키고 밤샘 실종자 수색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편 북한군은 NLL 남방 해상에서 해군의 구조 작업이 펼쳐지고 있지만 특별한 움직임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26일 육상에서 수 십차례 포사격 훈련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합참은 공식 확인하지 않고 있다.


 해군은 27일 전날 밤 서해상에서 침몰한 초계함 천안함의 실종자 46명에 대한 명단을 확인했다.

◇실종자(46명)

▲원사 이창기

▲상사 최한권 남기훈

▲중사 김태석 박경수 문규석 강 준 김경수 박석원 안경환 신선준 김종헌 최정환 민평기 정종율

▲하사 임재엽 문영욱 손수민 이상준 심영빈 장진선 조정규 서승원 방일민 박성균 조진영 서대호 차균석 김동진 박보람

▲병장 이상희 이용상 이재민 강현구 이상민(88년생) 이상민(89년생)

▲상병 정범구 김선명 박정훈 안동엽

▲일병 강태민 김선호 조지훈 나현민

▲이병 정태준 장철희

해군은 27일 서해 백령도 서남방 해상에서 침몰한 초계함 천안함(1천200t급)의 구조자 명단을 확인했다.

◇구조자(58명)
▲중령 최원일

▲소령 김덕원

▲대위 이채권 박연수

▲중위 김광보 정다운 박세준

▲상사 김병남 김덕수 오성탁 김수길 허순행 김정운 강봉철 오동환 정종욱

▲중사 이광희 김현래 조영연 손윤식 송민수 김현용 김광규

▲하사 홍승현 육현진 공창표 이연규 허향기 진경섭 배성모 전승석 함은혁 박현민 강은강 정재환 김효형 김기택 서보성 정주현 유지욱 정용호 라정수 신은총 김정원

▲병장 전준영 최광수 김용현 강태양 최성진

 ▲상병 안재근 김윤일 정현구

▲일병 김수철 오예석 황보상준

▲이병 이태훈 전환수 이은수

 

민군 합동조사단은 천안함 침몰 원인을 선체에 직접 폭발물이 닿지 않은 수중폭발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사용된 무기는 유도형 중어뢰와 대형 기뢰일 것으로 분석됐다.기뢰일 경우 지난 70년대 우리 군이 방어용으로 백령도 해역에 폭뢰를 개량해 설치했다 회수하지 못한 백여기의 기뢰에 초점이 맞춰다. 그런데 이 기뢰일 가능성이 없어졌다. 국방부가 오늘 이 기뢰가 기술적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없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SYN▶원태재 /국방부 대변인
"폭발물 제조 전문업를 통해 그동안 수차례제거되고 불능화 조치된 당시 기뢰는 폭발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또, 기뢰 설치 장소를 표시한 해도와 대조한 결과
기뢰가 설치된 곳은 천안함 침몰 지역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는 군당국이 천안함 침몰 원인을 기뢰가 아닌 어뢰로 판단하고 있고 어뢰 가운데서도 사실상 북한의 어뢰로 그 가능성을 좁혀놓은 것으로 해석이다.

따라서 현재 침몰해역에서 파편을 수거하는 작업과 천안함 절단면에 대한 분석은 이같은 가능성을 입증하는 쪽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군당국은 현재까지 무기로 추정되는 파편을 찾지 못했으며 천안함의 절단면을 특수 장비로
촬영한 사진을 미 해군에 보내 분석을 의뢰했다고 밝혔다. 민군 합동조사단은 다음주초 절단면 등에 대한 조사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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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주요인사 납치 테러.

 

북한은 휴전이후 지금까지 해상·공중·해외에서 모두 4백70여건에 걸쳐 3,738명에 이르는 한국인을 납치하여 대부분은 사상 세뇌교육과 간첩교육을 시킨 후 돌려보냈으나, 아직까지 수많은 인질을 억류하고 있는 세계적인 납치 테러국으로 통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인 납치뿐 아니라, 1970년경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노동당 작전부내에 외국인 납치조직을 만들어 놓고 전 세계 외국인에 대해서도 납치를 행하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 감시위원회와 미네소타 변호사 국제인권위원회가 1988년에 펴낸 [북한의 인권]에 의하면 1970년대 초 5명의 레바논 여인이 평양에 끌려가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납치되어온 여인들과 함께 간첩교육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으며, 1978년 홍콩에서 납치된 최은희·신상옥 부부도 평양초대소에서 마카오로부터 끌려온 중국인과 요르단 여인을 만났다고 폭로했다.

 

북한은 특히 일본인에 대한 납치공작도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 KAL기 폭파범 김현희에게 일어를 가르쳤던 '다구찌 야에꼬'(78년 피납)와 일본 중의원에서 폭로되어 일·북간 외교 문제화된 '요꼬다 메구미(니이가다현 거주, 77년 피랍 13세 중학생)', 그리고 현재 북한에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최종 확인된 '데라코에 다케시(63년 피납당시 13세 중학생)' 등이 납치사건의 대표적인 희생자들이다.

 

한국인에 대한 납북사건중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는 1969년 12월의 대한항공소속 YS-11기 공중 납북사건이다. 북한은 당시 고정간첩 조창희를 시켜 강릉 대관령 상공에서 승객과 승무원 총 51명을 태운 KAL기를 공중 납치했다. 이들 중 여승무원 정경숙과 성경희 등 12명은 아직도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상태다.

 

북한은 또한 서해나 동해의 휴전선 부근에서 어로 작업 중이던 어부 3,662명과 해군 20명 등 총 3,682명을 납치했는데, 1987년 1월 [동진호]가 백령도 부근에서 조업 중 북한 무장경비정에 의해 납치되었으며, 선장 김순근씨와 어로장 최종석씨 등 선원 12명은 지금까지도 억류되어 있다.

 

해외에서의 한국인 납치는 1978년 1월과 7월 홍콩에서의 영화배우 최은희·신상옥 부부 납치, 1979년 노르웨이 연수중이던 전(前)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씨 납치(1995. 8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것으로 판명), 1995년 7월 중국 연 길시에서의 순복음교회 안승운 목사 납치 등을 들 수 있다. 1983년 10월 19일 노동당 중앙당 청사 내 김정일 집무실에서 김정일이 납치되어온 최은희에게 "납치명령을 내가 내렸다"고 실토했듯이, 북한의 주요한 납치 및 테러공작은 김정일이 직접 지휘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편 국가안전기획부는 "지난 1987년 미국 유학 중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 이재환씨를 비롯해 납치 및 월북자 22명이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 중인 것으로 확인 됐으며, '특별독재대상구역' 등 다양한 호칭으로 함남 요덕, 함북 회령 등 산간오지에 10개의 정치범수용소를 설치하여 20여만 명을 재판절차 없이 집단 수용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앞으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 중인 납·월북자의 정확한 숫자와 소재지를 공개토록 북한당국에 요구하고, UN인권위원회와 국제사면위원회(AI) 등 국제기구에 진상조사를 촉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또 쌀 수입 대금 수천만 달러를 빼돌린 혐의로 태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과학기술 참사관 홍순경 일가를 강제로 납치 북송하려다 실패하였다. 이에 태국정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홍순경씨 납치는 태국 주권과 국내·국제법 및 1961년 체결된 빈 국제협약에도 위배되는 것이라면서 북한 측의 조속한 공식 사과와 함께 이 같은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약속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북한은 처음에는 특사를 파견하여 사건을 무마시키려 했으나, 태국과의 2차례의 협상을 마친 후 "북한 측은 홍씨 집 불법침입과 일가족 납치가 태국관리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며, 북한 외교관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며 자신들의 개입을 전면 부인하면서 강경 자세로 일관하였다. 이는 북한 측이 전형적인 전술로 북한 공관원들의 형사적 책임을 면해보려는 술책으로 보인다.

 

북한이 이처럼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납치행각을 벌이는 목적은 첫째, 북한방문 외국손님들을 접대케 한 후 첩보를 수집토록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일어교사였던 일본인 다꾸찌 야에꼬와 같이 해외공작 지도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이며 셋째, 납치한 한국인들에 대해 세뇌교육 및 간첩교육을 시켜 한국에 남파시켜 파괴공작에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5장 주요시설 파괴 테러.

 

북한의 테러 활동 중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국가 주요 시설 파괴로 남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 기간사업이자 간접자본시설인 철도를 비롯하여 공항 및 항만시설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본고에서는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행한 철도 폭파 테러와 대구 미 문화원 정문 폭파사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경원선 철도 폭파 테러

 

경원선 철도 폭파사건은 1967년 9월 5일 20:25 간첩이 열차 레일 밑에 매설한 것으로 보이는 TNT가 폭발하여 달리던 열차 5량 중 3량이 탈선한 사고가 포천군 청산면 초성리의 경원선 초성역 남방 500m지점에서 발생하면서 생긴 사건이다.

 

서울역발 신탄리행 311호 열차가 승객 400여명을 태우고 초성 역에 진입 직전 급커브를 돌 때 기관사 오경섭이 50m 전방에서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불꽃을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잡아 아슬아슬하게 인명피해는 막았으나 매설된 TNT가 폭발하는 바람에 앞에 있던 객차 3량이 약 2m 정도 탈선했다.

 

이 폭발로 열차 하부가 대파되었고 레일 60여m가 끊겨 엿가락같이 휘었으며, 300여 개의 침목이 마구 흩어졌는데, TNT가 폭발한 지점에는 직경 2.5m, 깊이 50㎝의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사고원인 조사차 현장을 답사한 군·경 합동수사반은 폭발지점에서 하천을 건너 약 200m 전방의 마차산 밑 동굴까지 0.5㎜ 동선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이로써 간첩이 배터리를 사용하여 TNT를 폭파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군 수사기관은 북한 간첩이 후방교란을 위하여 열차를 폭파하려 한 것으로 보고 간첩 색출을 위하여 사고지점 부근을 정밀 수색하였으나 용의자를 찾지 못하였다.

 

한편 약 1년 후인 1968년 8월 5일 01:25에는 강원도 정선군 남면 문곡리 정선선 별어곡역 북방 400m 지점에 있는 남천 제3철교에 장치해 놓은 폭약이 폭발직전에 발견되어 경찰을 긴장하게 하였다.

 

폭약과 뇌관에 도화선을 연결시킨 이 폭파장치는 철교 3개소에 1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날 02:02에 동역에 도착할 서울발 정선행 제5-9호 열차의 도착 직전에 동역 직원인 장효덕이 초롱불을 들고 순찰 중에 폭파장치를 발견하여 제거함으로써 열차 폭파가 미연에 방지되었다. 북한은 후방교란 등을 통해 남한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서 열차 폭파 테러를 자행하였다.

 

2. 대구 미문화원 폭파 테러.

 

아웅산 테러 2년 후에 일어난 1983년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은 북한이 한·미간의 외교 분쟁을 노리고 행한 테러 사건이다. 1983년 9월 22일 대구 미 문화원 정문 폭파 사건은 무장 간첩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9월 22일 21:33경 대구시 삼청동 2가에 위치한 미국 문화원 정문 앞에서 강력한 폭발물이 터져 대구 영남고등학교 1학년생인 허병철 군이 현장에서 숨지고 대구 중부 경찰서 김철호 순경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미 문화원 건물 앞벽이 허물어지고 이 건물과 인근 한국은행 대구 지점 현장에서 100미터 떨어진 경북의대와 의대부속병원 등의 유리창 500여장이 깨졌다. 수사당국은 1980년 12월 9일 광주 미 공보원 및 1982년 3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이어 발생한 미 문화원 사건이라는 점을 중시하고 관계기관과 합동으로 다각적인 수사를 펼쳐 나갔다.

 

사건은 21:25경 숨진 허 군이 여학생 보조가방으로 쓰이는 가로 세로 각 26㎝ 두께 5㎝의 감색 헝겊 가방을 현장에서 300미터 떨어진 대구시경 정문 근무자 김일환 일경에게 가지고 와서 신고했다.

 

김일경에 따르면 허군은 길을 가다 이상한 가방이 있어 주워왔는데, 미 문화원 앞에는 이 보다 더 큰 가방이 하나 더 있다고 해서 시경은 관할 경찰서인 중부경찰서에 연락하자 김철호 순경이 시경으로 와 허군을 데리고 미 문화원 현관 앞 계단에 도착한 순간 현장에 있던 큰 가방이 갑자기 터졌다.

 

이 사건은 사건 당시부터 무장 간첩의 소행이라고 판단했는데, 1983년 12월 8일 대간첩 대책본부는 다대포 해안에서 생포된 진충남과 이상규 등 2명의 생포간첩 증언을 인용 대구 미 문화원 폭파사건이 북한 소행임을 최종 확인하게 되었다. 북한은 미 문화원을 폭파함으로써 한·미간의 외교 분쟁은 물론 남한사회의 혼란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제6장. 무장공비 침투 테러.

 

북한이 1960년대부터 가장 많이 이용한 테러중의 하나가 무장공비 침투를 이용한 테러이었다.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남한 사회를 극도로 혼란하게 하였을 뿐 만 아니라 한반도를 긴장 상태로 조성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러한 무장공비 침투사건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공산당이 싫어요"로 산 반공 교재 역할을 했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1970년대의 대표적 무장공비침투사건인 광천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울진·삼척 지구 무장공비 침투 테러.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무장공비 침투의 대표적 사례(事例)라고 할 만큼 인원 규모와 그 잔인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북한은 대남 공작이 강경파에 의해 주도된 이래 본격적인 게릴라 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지하조직 및 불순세력의 선동으로 민중봉기를 획책하여 전쟁도발의 구실을 모색하고 지하조직의 사기진작과 직·간접 지원으로 이탈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북한은 폭력혁명의 일환으로 무자비한 테러 및 파괴활동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사상적 중립층(中立層)의 확대와 당국에 대한 협력을 저지하며, 전후방 동시전투 식의 모택동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군경부대의 분산과 병력소모 및 피로를 촉진시키고, 위조지폐의 대량사용으로 남한의 경제 질서를 혼란시키고자 기도하였다.

 

북한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신사복·등산복 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펴게 하였다.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11월 3일 새벽 주민들을 모아놓고 남자는 남로당, 여자는 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총검으로 위협하였다.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머뭇거리자 대검으로 찌르는 등 만행을 자행하고 뒤늦게 도착한 주민은 돌로 머리를 쳐서 죽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소사 초등학교 계방분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승복(당시 10세) 어린이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주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릴레이식으로 신고하여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군경의 출동을 가능케 하였다. 군경과 예비군은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착수,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 계속된 작전에서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여 침투한 120명을 모두 소탕하였다.

 

이 작전에서 우리 측도 군인·경찰과 일반인 등 20여명이 사망하는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북한이 아무리 잔악한 공비를 침투시켜도 이를 격멸할 수 있다는 튼튼한 안보태세를 실증(實證)으로 보여주었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북한이 우리나라의 산악지대와 농촌에서의 게릴라활동 가능성을 탐색해 본 것이며, 한국에서 월남과 같은 전쟁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한 것이었다.

 

2. 광천지구 무장공비 침투 테러.

 

충남 광천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북한 노동당 소속 무장공비 1개조 3명이 군사정찰 및 사회혼란을 목적으로 1978년 11월 4일 19:00경 충남 홍성군 광천읍 부근 해안으로 아군에게 발견 당하지 않고 침투한 사건이다. 이들은 11월 7일 14:30경 광천 소재 말봉산에서 화목을 채취하던 부녀자 3명중 2명과 조우하자 노출을 우려한 나머지 여인들을 살해하고 현장을 이탈하였다.

 

이때 위기를 모면한 1명의 여인이 하산하여 21:30에 경찰에 신고하였으며, 군용 물품이 발견됨으로써 무장공비의 침투사실이 알려져 이튿날부터 군·경·예비군의 합동작전이 전개되었다.

 

무장공비 3명은 12월 4일 밤에 북한으로 복귀할 때까지 31일간에 걸쳐 작전이 전개되고 있는 아군 후방지역에서 230㎞에 달하는 장거리를 육로로 이동하다가 교묘히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작전기간 중 광천, 공주, 평택, 오산 등지에서 민간인 5명을 살해하면서 북한과 무려 30회 이상 교신하였으며, 몇 차례나 아군 매복조와 조우하였으나 이를 교묘히 피하였고 12월 4일 자정쯤에 김포의 감암포에서 안내간첩 2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복귀하였다.

 

이 사건은 기간 중 보병 3개 사단과 특전사 소속 5개 공수특전여단 등 병력 27,000여 명과 충남과 경기 일원의 경찰 및 예비군 180,000여명 등 207,000여 명이 작전이 투입되어 봉쇄·수색 및 매복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단 1명의 적도 사살하지 못함으로써 많은 문제점을 남겨 준 사건이었다.

 

이후 북한은 특수 제8군단 예하 저격여단과 제17정찰여단 등외에 공정대대와 상륙여단까지 편성함으로써 1980년대 초에는 비정규전 병력이 더욱 증가되어 10만여 명 이상으로 판단되고 있다. 북한은 이들 비정규전 요원들을 수송하기 위하여 고속상륙정을 포함한 각종 선박과 AN-2기를 비롯한 각종 수송기를 계속 도입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남한지역 어디에든지 지상침투와 해상 및 공중수송으로 비정규전 요원들을 신속히 투입하여 남한을 단시일 내에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3. 기습남침을 위한 전방땅굴.

 

-땅굴의 위치 및 규모.

구 분

제1땅굴

제2땅굴

제3땅굴

제4땅굴

발견일시

1974.11.15

1975.3.19

1978.10.17

1990.3.3

위치

고랑포 동북방8km

철원 북방13km

판문점 남방4km

양구 북방26km

크기

높이 1.2m폭 90cm

높이 2m폭 2m

높이 2m폭 2m

높이 1.7m폭 1.7m

깊이

지하 45m

지하 50~160m

지하 73m

지하 145m

총길이

3,500m

3,500m

1,635m

2,052m

침투길이

1,000m

1,100m

435m

1,028m

현재까지 4개소가 공식 발표되어 공개하고 있음.

 

 

                           

                                      제1땅굴                                                                               제2땅굴

 

 

                             

                                   제3땅굴                                                                                  제4땅굴

 

1978년 10월17일에 발견된 제3땅굴은 제2땅굴과 거의 같은 규모이다. 판문점 남방 4km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땅굴은 아치형으로 1시간에 3만 여명의 무장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이다.

 

제3땅굴은 제1,2땅굴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위치가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km, 통일촌 민가에서 3.5km밖에 안 되는 곳으로서 서울까지는 불과 44km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현제까지 4개의 땅굴이 있다.

현재도 파는 중인지 굴설 작업을 마쳤는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땅굴을 만들면 버럭이 생기고 이 버럭은 차량으로 후방지역으로 이동해야 함을 볼 때 현재 미군의 최첨단 주야간 위성감시체계와 귀순자첩보, 탈북자첩보 등을 볼 때 땅굴을 파지는 않는 걸로 판단되고 있답니다.

 

땅굴은 북한의 공병국에서 주도하고 있고 이 공병국은 최근 병력을 5만 명가량 줄였으며 중장비가 없어서 땅굴당 수백명단위의 인원이 동원되고 있음에 비춰볼 때 땅굴입구가 있는 전방지역에서 이런 병력의 유동은 현재 파악되지 않은 걸로 압니다.

 

공병국은 현재 핵관련시설의 지하시설물 구축에 동원되고 있고 대규모 토목공사와 빌딩공사에 투입되는 중입니다. 군에서는 그 병력을 수십만 명 단위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공병을 중시하는 중공군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상이라고 하다.

 

북한도 미국처럼 공병의 능력을 대대적으로 국가건설에 투입하고 있고 공병병력수도 우리 육군보다 더 많습니다.사단공병이 있고 연대나 여단에도 공병중대가 있다.즉 사단엔 2개공병대대 규모 이상이 있다는 겁니다. 국가 대단위 공사엔 공병국 직할의 군 병력과 노동적위대가 동원되고 있다.

 

 

 

 

4. 북한 테러의 특징.

 

북한이 휴전이후 1990년대 말까지 자행한 대남 테러사례는 1968년 청와대 기습, 울진·삼척 무장공비 습격, 19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테러 폭파,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 등 550여건에 달하고 있다.

 

또 북한의 국제테러 지원 사례로는, 1969∼1971년 북한으로부터 훈련 및 자금을 지원 받은 게릴라들이 브룬디 및 르완다 정부요인의 암살을 기도하다 적발되었는가 하면,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국제테러 단원 80여명을 체포했는데 이중 24명이 북한 요원으로 확인되었다.

 

북한은 일본 항공기 요도호 납치범과 가족 등 테러범을 보호하고 있고, 또 아프리카 친북(親北) 국가에 군사고문단을 상주시켜 군사 및 테러훈련을 지원하는 등 국제테러 지원활동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북한의 테러공작은 1974년부터 김정일이 진두지휘해 왔으며, 테러 관련 북한 기관으로는 노동당 산하 4개부서, 즉 사회문화부, 통일전선부, 대외정보조사부, 작전부와, 그리고 인민무력부 정찰국이 적극 참여하고 있다.

 

북한의 테러에 대해 표방하고 있는 이론적 근거는 1975년 10월 출간한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결정적 투쟁은 오직 폭력적 방법에 의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한국의 공산화와 민주주의 국가 파괴를 위한 테러를 혁명적 행위로 정당화시키고 있다.

 

특히 미국의 테러사건에 대해 북한이 즉각 테러행위를 반대한다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여전히 1988년 이후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 결과 미국 내 우편에 의한 탄저균 배달이 있을 때, 미국은 배후 국으로 이라크와 북한을 의심하였다.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테러국으로 지정된 것은 19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테러를 저지른 직후인 1988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계속되어 왔다.

 

이 보고서는 "북한은 지난해 테러회담에 세 차례 참여해 테러에 반대했고, 테러활동에 대한 국제적인 조치들을 지지할 것임을 재천명한 북·미 공동성명을 완성했으나, 1970년 일본항공(JAL)기를 북한으로 납치한 일본 적군파 요원들에게 피신처를 계속 제공하고 있다"며 재(再) 지정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이러한 북한이 1950년대 말부터 자행해 왔고, 또 1988년 이후 미국이 14년 연속해서 테러지원국가로 지정하고 있는 북한 테러의 특징을 시기별로 그 목적, 테러 대상과 범위, 그리고 특징 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구분되고 있다.

해방이후 1990년대까지 북한이 자행한 테러의 특징은 시기별로 크게 6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즉, 해방∼한국전쟁 발발이전,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이다. 그리고 테러의 형태와 양상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요 요인 암살에서, 항공기 납치, 대통령 암살,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 민간 여객기 공중폭발, 국제행사 방해를 통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고립화, 귀순자 및 해외주재 한국외교관 피살 등으로 점차 대담성과 그 잔인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북한 테러의 특징을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해방∼한국전쟁 발발이전까지이다.

 

이 시기는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2년간이 포함되나, 대남 테러와 관련한 사항은 주로 한국전쟁 이전인 미군정과 정부수립 이후부터 한국전쟁 발발이전까지이다. 이 시기 주요 테러사건으로는 현준혁 암살, 제주 4.3사건, 여순 10.19사건, 그리고 이승만 박사 저격을 비롯한 남한 내 주요 요인 암살기도였다. 북한은 비밀공산당원이나 남파된 간첩을 통해 공산정권수립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이에 반대하는 남한 내 반공 세력에 대한 테러 및 전복활동을 주로 실시하였다.

 

2. 한국전쟁이 포함된 1950년대이다.

 

이 시기 북한은 한반도 분단체제가 고착된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테러를 시작하는 시기이다. 기간 중 주요 테러는 1958년 항공기 납치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테러의 특징은 북한이 한국전쟁이 패인을 분석하면서 그 대안으로 테러리즘의 기반을 강화했다는 점이다. 이 때 북한은 테러를 위해 직접 공작원을 남파하여 비행기를 납치 등을 주도하여 남한 사회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케 하였다.

 

3. 한국이 경제개발과 자주국방체제를 마련하는 과정에 있었던 1960년대이다.

 

북한은 1960년대부터 테러를 노동당의 주요 사업으로 계획하여 추진하였다. 즉, 1961년 9월 제4차 노동당 대회 결의서(決意書)에서 대남 테러를 통해 한국 체제를 약화시켜 한반도를 적화 통일한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고, 1962년 노동당 제4기 8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지시와 1965년 노동당 창설 20주년에 즈음한 김일성 축사를 통해, 그리고 1966년 제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테러 노선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북한의 테러정책의 배경은 공산주의자들이 테러 전술을 게릴라전과 함께 무장 폭력봉기를 혁명전쟁으로 확대시키는 결정적 요소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60년대 북한의 테러는 이러한 목적과 의도 하에 추진되었다.

 

이에 북한은 한국의 경제 발전상을 보고 위기감 속에서 남한의 혼란과 무력적화통일을 조기에 실현시키기 위해서 대통령을 암살하고, 한·미연합방위태세를 약화시키고, 그리고 후방지역을 교란할 목적으로 청와대 기습,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울진·삼척무장공비 침투 등 전쟁에 버금가는 테러행위를 자행하였다.

 

4. 1970년대는 경제 발전의 격차가 심화되고, 한국의 자주국방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 북한의 테러행위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북한은 특수공작원은 물론이고 재일교포까지 끌어들여 남한의 국가 지도체제 말살과 정치혼란을 야기(惹起)시키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는 국립현충문 폭파사건과 8·15광복절 대통령 저격사건이다.

 

5. 1980년대도 북한의 대남 테러는 197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최고의 극치를 이루었다.

 

1981년과 1983년 두 차례에 걸쳐 캐나다와 미얀마를 국빈 방문 중인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자 북한은 '86아시안 및 '88올림

 

픽 개최를 방해하기 위해 김포공항 폭파사건과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이 시기 북한의 테러 목적은 대통령 암살과 남한의 정치, 경제, 사회 질서를 파괴하여 그들의 혁명 전략을 완성시키려는 것이었다.

 

6. 1990년대 북한은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붕괴와 김일성의 사망, 그리고 북한 내 3중고로 인해 내부붕

괴의 조짐을 보이는 시기였다.

 

이 시기 북한은 이러한 체제결속 및 내부단결을 위해 테러행위를 자제하다가 어느 정도 체제강화가 완료된 시점인 1996년부터 강릉무장공비 침투와 NLL침범, 그리고 귀순자 이한영과 러시아 한국영사 피살 등 테러를 자행하였다. 이는 남한 사회를 불안케 하고, 북한 체제의 결속을 유지하면서 북한 이탈세력인 반북(反北) 요원에게 공포감을 주어 귀순을 막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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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Ⅲ부. 휴전협정 후 북한의 테러사건들.[차례]

 

제1장. 국가원수 암살 테러.

 

1. 1·21 청와대 기습

2. 국립현충문 폭파테러

3. 8·15 광복절 대통령 저격 테러

4. 아웅산 국립묘지 대통령 암살 테러

 

제2장. 항공기 테러.

 

1. 1969년 대한항공 YS-11기 납북 테러

2.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 테러

 

제3장. 해상 테러

 

1. 해군 제56함 공격 테러.

2. 해경 제863호 경비정 공격 테러

3. 미 정보함 푸에블로함 납치 테러.

4. NLL 침범 해상 테러.

5. 서해 교전.

 

제4장. 주요 인사 납치 테러.

 

제5장 주요시설 파괴 테러.

1. 경원선 철도 폭파 테러

2. 대구 미문화원 폭파 테러.

 

제6장. 무장공비 침투 테러.

1. 울진·삼척 지구 무장공비 침투 테러.

2. 광천지구 무장공비 침투 테러.

3. 기습 남침을 위한 전방의 땅굴.

4. 북한 테러의 특징.                       (처음으로)